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寝ながら学べる構造主義 (2002년)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철학 > 서양철학
우치다 다쓰루 지음 | 이경덕 옮김
14,500원 | 224쪽
ISBN : 9788990809339
2010년 10월 5일 출간
✦ 책 소개
2002년 출간 이래 증쇄를 거듭하며
단 한 번도 스테디셀러의 자리에서 내려가지 않은
구조주의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에서부터 소쉬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까지!
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과 핵심 사상을 한자리에서 만난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출발해 구조주의의 기원과 역사, 그 내용을 추적하고, 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그들 사상의 핵심을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한 구조주의에 관한 탁월한 해설서이다. 어려운 사상이나 개념을 쉽게 풀어 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저자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책으로, 구조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구조주의에 대해 알고 싶었던 일반 대중 모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최고의 구조주의 개론서이다.
“우리가 구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모든 학문의 본질이 그렇듯이 우리가 보다 잘 살고 행복해지기 위함”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다른 책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구조주의의 인간적 면모를 통해 그 현재적 의의를 돌아보게 하는, ‘교과서’적인 정보 이상의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 추천의 글
구조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해 구조주의의 기원과 역사, 그 내용을 추적하고, 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그들 사상의 핵심을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한 구조주의에 관한 해설서. 어려운 이론을 쉽게 풀어 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저자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책으로, 구조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구조주의에 대해 알고 싶었던 일반 대중 모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최고의 구조주의 개론서이다.
_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 지은이
우치다 타쓰루 (內田樹)
사상가이자 무도가.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고베여학원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가이후칸(凱風館)이라는 고베 소재 아이키도장의 관장으로 아이키도 수련을 지도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철학에 깊게 영향을 받아 반(反)유대주의와 유대교, 그리고 레비나스 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현재는 레비나스 철학과 카뮈의 철학 그리고 일본의 전통 무예인 아이키도에 기초하여 교육론, 무도론, 영화론, 만화론, 신체론, 예술론, 종교론, 미국론, 중국론, 한일론 그리고 정치론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집필 활동과 언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망설임의 윤리학』 ,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 『스승은 있다』 ,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 『교사를 춤추게 하라』 , 『완벽하지 않을 용기』 등이 있다.
✦ 옮긴이
『신화연구자.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인류의 신화와 의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의례, 축제, 신화, 경제인류학 등을 탐구하고 강의한다.
그는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신화의 의미를 거듭 궁리해야 하는 이유가 ‘이야기의 힘’에 있다고 본다. 커피 한 잔에서 챗GPT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이야기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정점에 ‘신화’가 있다.
지은 책으로 『새롭게 만나는 한국신화』, 『처음 만나는 북유럽신화』,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신화』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그리스인 이야기』, 『주술의 사상』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는 이른바 ‘구조주의의 4총사’라고 불리는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구조주의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다. 이미 구조주의에 관해 다양한 저작들이 나와 있지만 쉽게 읽을 만한 책이 눈에 잘 띄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 책의 등장은 반길 만한 것이다. 저자 우치다 타쓰루 교수는 어려운 사상이나 이론을 쉽게 풀어 쓰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해, 구조주의의 정의에서부터 구조주의의 기원과 역사, 대표적 인물 및 사상을 한눈에 들어오도록 말끔히 정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구조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구조주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 모두에게 유용하게 다가갈 탁월한 구조주의 개론서이다.
책의 「제1장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에서는 본격적인 구조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 구조주의의 토대를 다진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의 핵심 사상을 들여다보고, 「제2장 창시자 소쉬르의 등장」에서는 구조주의 시대의 서막을 연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해 살펴본다. 「제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에서는 ‘구조주의의 4총사’ 중 첫 번째 인물로 언급되는 푸코의 사회사 작업을 들여다보며 「제4장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에서는 ‘구조주의 4총사’의 두 번째 인물로, 비평 이론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바르트의 핵심 사상을 살펴본다. 「제5장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에서는 ‘4총사’의 세 번째 인물로,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문화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을 만나보고, 마지막 「제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에서는 ‘4총사’의 마지막 주자인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알아본다. “우리가 구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모든 학문의 본질이 그렇듯이 우리가 보다 잘 살고 행복해지기 위함”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다른 책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구조주의의 인간적 면모를 통해 그 현재적 의의를 돌아보게 하는, ‘교과서’적인 정보 이상의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인간은 ‘자율적인 주체’인가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우치다 교수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_본문에서
저자의 설명은 명쾌하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 전반에 걸쳐 이야기되는 구조주의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구조주의의 기원을 알기 위해 저자는 우선 “우리의 사고와 판단에 도대체 객관성이란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연구함으로써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세 명의 문제적 인물들을 불러 모은다.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다. 이 책의 「제1장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에서 우리는 본격적인 구조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 구조주의의 토대를 만든 이 역사적 인물들과 조우한다.
구조주의의 토양을 다지다
마르크스는 평생을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어떤 특수한 조건에 의해 성립되는가?’라는 의문에 깊이 천착했다. 이에 그는 “사회집단이 역사적으로 변화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서 ‘계급’에 주목”했다. 즉 “인간의 개별성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가?’가 결정”한다는 것. 주체성의 기원이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는 이 사실은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개념으로,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중요한 생각이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야말로 훗날 구조주의의 시대의 토양을 다진 가장 결정적인 공헌자로 지목된다. 반면 프로이트는 인간의 가장 안쪽에 있는 영역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마음의 활동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지배하는 것. ‘무의식’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 가운데 “인간의 사고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주장한 또 하나의 인물이 있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는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외적 규범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실은 “어떤 시대나 지역의 고유한 편견”일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에 대해 우리는 결코 ‘인식자’일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다분히 의미심장하다.
이 책은 이들의 사상이 깊은 곳에서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기 정신생활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고,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으며, 니체는 인간이 외적 환경에 의해 달라지는 존재임을 간파했다. 이들의 사상에서 구조주의가 직접 발현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이들이 구조주의의 땅 고르기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소쉬르, 구조주의의 시대를 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인물은 누구일까? “프로이트가 빈에서 정신분석 강의를 하고 있던 시기와 거의 비슷한 때”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에서 “한 명의 언어학자가 소수의 언어학자와 언어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앞에 두고 ‘일반언어학 강의’를 하고” 있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 바로 그가 사상사적으로 구조주의를 시작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 책의 「제2장 창시자 소쉬르의 등장」에서는 소쉬르 사상의 핵심적 내용을 통해 구조주의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과정을 지켜본다.
저자는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안겨준 가장 중요한 견해”로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라는 것을 예로 든다. 그리스 이후의 전통적인 언어관에 따라 ‘언어는 사물의 이름’으로 인식돼왔으나 소쉬르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서 “사물의 이름은 인간이 제멋대로 붙인 것”이라며 사물과 그 이름이 “특별한 필연성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또한 “어떤 것의 성질이나 의미, 기능은 그 사물이 그것을 포함한 관계망, 또는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차후에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소쉬르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한 언제나 자기가 속한 언어 공동체의 가치관을 승인하고 강화”한다는 사실도 일깨워주었다. 즉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 같은 공동체에 속한 ‘타인의 말’이다. 따라서 저자는 “‘내가 말할 때’ 그 말이 국어의 규칙에 속박되고 규정된 어휘”로 이루어졌다면 “우리가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타인으로부터 얻은 것이 되며, 그때 ‘내가 말한다’라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됨을 이야기한다.
이렇듯 내가 말하는 것의 기원이 실은 대부분 나의 외부에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소쉬르로부터 비롯됐다. “20세기 초반 제네바 대학교의 어느 작은 교실에서 한 명의 언어학자가 강의한” 이 이론은 이후 다양한 학파를 형성하며 서로 다른 영역으로 전개되었다. 구조주의의 서막은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시작됐다.
푸코, ‘나’의 기원을 찾아
이 책은 소쉬르로부터 프라하학파를 거쳐 이 새로운 사유의 세례를 입은 프랑스의 전후세대를 구조주의의 ‘제3세대’로 분류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회사 분야의 미셸 푸코, 기호학의 롤랑 바르트, 인류학의 레비스트로스, 정신분석학의 라캉이다. 저자는 이들을 이른바 구조주의에 있어 가장 중요한 ‘4총사’로 칭하며 책의 상당 부분을 이들의 사상을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이 책의 「제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에서는 그중 푸코 사상의 개략을 살핀다.
“모든 문물에는 고유의 탄생일이 있고, 탄생에 이르는 고유한 전사(前史)의 맥락을 파악하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잊는다. 그리고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며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거부터 계속해서 지금처럼 있어왔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푸코는 인간의 이러한 어리석은 “믿음을 분쇄하겠다”는 목표 아래 굳건히 연구에 매진했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광기의 역사』 『지의 고고학』 등 그의 이론을 대표하는 많은 저작에서 그는 사물의 진정한 기원을 탐색한다. “‘감옥’이 되었건 ‘광기’가 되었건 ‘학술’이 되었건, 우리는 모두 그것이 시대나 지역과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동일”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제도는 과거의 어느 지점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의 복합적인 효과로서 탄생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지극히 당연한 (그러나 망각하기 쉬운) 사실을 지적하고 그 제도나 의미가 생성된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 그것이 바로 푸코의 ‘사회사’ 작업”이다.
“여기에 있는 이 ‘나’는 도대체 어떤 역사를 경유하여 형성된 것일까?” 이 책은 그것을 묻는 것이 푸코가 주장한 ‘비판 구조’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러나 저자는 실은 그것이 “자기의 눈으로 자기의 뒤통수를 보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는 희망임을 털어놓는다. 그 불가능한 작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푸코이기에 그의 삶과 사상이야말로 더욱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르트, ‘저자는 죽었다.’
바르트의 견해는 매우 다채로운데, 이 책의 「제4장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에서는 그중에서도 ‘에크리튀르’라는 개념과 ‘저자의 죽음’이라는 바르트 사상의 핵심을 살펴본다.
소쉬르가 알려준 것처럼 “우리의 사고나 경험의 양식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사고나 경험의 양식도” 변한다. 즉 우리가 모국어를 자유롭게 쓰고 있다고 믿을 때에도 “언어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운용”된다. 이 규칙이 ‘랑그’와 ‘스틸’이다. 랑그는 ‘외부로부터의 규제’, 즉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이며, 스틸은 우리가 말을 할 때 “우리의 언어 운용을 ‘내부에서’ 규제하는” 개인적인 언어 감각이다. 그리고 이들 외에 우리의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제3의 요소가 바로 ‘에크리튀르’다.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로서 바르트에 의하면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지닌 ‘자연’적 어법에 부여해야 하는 사회적 장”의 선택을 뜻한다. 이 개념은 어법과 인간사회, 혹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엄연히 “‘얽힌’ 구조가 있음”을 알게 하고 이를 “비평의 기본원리”로 제시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또 바르트는 저자를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이루어내는 사람으로 보는 근대비평의 원리를 부정했다. ‘텍스트’란 일종의 ‘직조물’로서, 한 편의 텍스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다양한 곳으로부터 다양한 과정을 거쳐 다양한 요소로 채워지기 마련인 이 ‘직조물’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의 죽음’이다. 그의 이 새로운 개념은 ‘저자’라는 근대적인 개념이 통용되는 시기가 이미 지났음”을 알리며 독자의 탄생이 있기 위해서는 “저자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카피라이트’가 가져다주는 “명성이나 이익, 권력”에 개의치 않고 “텍스트의 생성이라는 운동” 속에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찾아낸 바르트의 자세는 특히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인에게 많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레비스트로스, ‘야만’과 ‘문명’의 경계를 허물며
푸코와 바르트에 이어 이 책의 「제5장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에서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문화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을 소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구조를 음운론의 이론 모델로 해석하는” 대담한 방식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구조주의 인류학의 개척자이다. 소쉬르의 직계인 프라하학파의 로만 야콥슨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인류학의 분석 방법에 언어학을 접목시켜 ‘미개사회’를 ‘또 다른 문명사회’로 재구성해냈다. 한마디로 ‘문명인’과 ‘미개인’은 사물에 대해 관심을 갖는 방법이 다를 뿐 ‘문명인’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 것이 ‘미개인’이 지적으로 열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방대한 현지조사를 기초로 한 그의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하이데거 존재론으로 ‘완전 무장’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분쇄하는 것을 보며 동시대의 사람들은 경악”했다. 자연히 “이 시점을 기해 프랑스 지식인들은 ‘의식’이나 ‘주체’에 대해 말하기를 그치고 ‘규칙’과 ‘구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명실상부한 구조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본성이 ‘증여’에 있음을 간파했다. 사회는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화”할 필요가 있는데, 이에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주고받는 ‘반대급부’의 행위인 ‘증여’는 인류학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만든 모든 사회 시스템은 그것이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며 만약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본성이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손에 넣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자기가 독점하고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사회는 그런 “정지적(靜止的)이고 이기적인 생활 방식을 허용”해오지 않았다. 이러한 레비스트로의 인간적인 통찰이야말로 우리가 이 책을 보며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깨달음 중 하나이다.
라캉,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를 찾아
끝으로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장인 「제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에서는 ‘구조주의의 4총사’의 마지막 주자이자 가장 난해한 관문인 라캉에 대해 이야기한다.
라캉의 전문 분야는 정신분석으로 그는 ‘프로이트로 돌아가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말 그대로 프로이트가 개척한 길을 곧장 깊이 파고들어간 것이 라캉의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된다. 그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나’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인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어른’ 또는 ‘인간’이 “이 두 번의 자기기만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라캉의 주장은 흥미롭다.
또 라캉은 정신분석의 목적이 그 ‘원인’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닌 ‘치료’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때의 ‘치료’라 함은 서로 간의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의 답보 상태에 빠진 피분석자(환자)를 다시 커뮤니케이션의 회로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과 말을 교환하고 사랑을 나누고 재화와 서비스를 나누는 증여와 답례의 왕복운동 속으로” 피분석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뜻 깊은 행위다. “정체되어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의 공유를 통해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 정신분석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타인과 인간적으로 ‘공생’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책을 보며 깨닫는다. 이 책은 어렵기로 소문난 라캉의 이론이 결국엔, 인간관계의 건강한 지속을 위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련의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구조주의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저자의 구조주의 시민강좌 강의 노트에서 비롯된 것으로, 저자의 명강의가 단 한 번에 그치는 것을 아쉬워한 출판사의 적극적 권유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2002년 출간된 이래 구조주의에 관한 가장 뛰어난 입문서 중 하나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구조주의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난해한 이론들로 머리가 아팠던 독자들이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책이다. 어려운 사상이나 개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쉽게 설명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우치다 교수는 구조주의 이론에 대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 탁월한 비유와 세심한 설명, 다양한 인용문들을 통해 사람들이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구조주의에 접근하도록 했다. 역사를 뜨겁게 달군 희대의 사상과 그 주인공들을 통해 구조주의 전사(全史)를 더듬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마치 눈앞에서 한 편의 멋진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이 책이 내놓는 대답은 ‘그렇다’이다. 오만과 편견을 떨치고 다양한 세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인식할 것을 권유하는 구조주의의 목소리는 ‘소통의 부재’가 횡행하는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진정한 평등의 가치를 일깨우고, 세계와 소통하는 법, 나 자신을 인식하는 법, 타인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법을 일러준다. 그런 점에서 구조주의는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야만 할 사유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구조주의의 속성을 알고 그것을 면밀히 이해하는 일은 현재의 나의 삶을 이해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 더욱 진보된 사회를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이 한 권의 필수적인 ‘교양서’로서 모두에게 가치 있는 이유다.
✦ 목차
들어가는 말
제1장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
우리는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마르크스의 지동설적인 인간관
‘무의식의 방’을 발견한 프로이트
‘억측에 의한 판단’을 비난한 니체
제2장 창시자 소쉬르의 등장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
경험은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것
‘타인의 언어’를 말하는 우리
제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
역사는 ‘지금·여기·나’를 향해 있지 않다
광기를 긍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신체는 하나의 사회제도
왕이 지닌 두 개의 신체
국가는 신체를 조작한다
사람은 왜 성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할까?
제4장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
‘객관적인 언어 사용’이 패권을 쥔다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
‘순수한 언어’라는 불가능한 꿈
제5장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
‘구조주의의 시대’가 열리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
‘분쇄’된 사르트르
음운론은 어떤 것인가?
모든 친족관계는 2비트로 표시된다
인간의 본성은 ‘증여’에 있다
제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
유아는 거울을 통해 ‘나’를 손에 넣는다
기억은 ‘과거의 진실’이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가치가 있다
나오는 말
옮긴이의 말
참고 문헌
✦ 책 속에서
구조주의란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파헤친 것이 구조주의의 성과입니다.
_27~28쪽
20세기 초반 제네바 대학교의 어느 작은 교실에서 한 명의 언어학자(소쉬르)가 강의한 이론은 그 후 (…) 프라하학파에 의해 계승되었고, (…) 다양한 문예 사상 운동과 이종배합을 하면서 사상의 수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1920~1930년대의 동유럽, 러시아를 중심으로 두드러진 이 새로운 학문적 지식의 파도 속에서 구조주의가 생성됩니다. 이 새 물결의 세례를 받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친 프랑스의 전후세대는 구조주의의 ‘제3세대’에 해당됩니다. 이 사람들(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에 의해 그때까지 언어학에 한정되어 있던 구조주의 이론은 단숨에 다양한 인접 영역으로 전개되었고 곧바로 보편적인 지적 위상을 획득하게 됩니다.
_81~82쪽
푸코의 사회사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 ‘권력’이라는 말을 단순히 ‘국가권력’이라든지, 그것이 조종하는 각종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실체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권력’이란 모든 수준의 인간적 활동을 분류하고, 명명하고, 표준화하여 공공의 문화재로 지의 목록의 등록하려고 하는 ‘축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 비판론이라고 해도 (…) 실질적으로 열거하고 목록화해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부여하는 한 그것 자체가 이미 ‘권력’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_120~121쪽
바르트가 탐구한 것은 ‘어법의 각인이 찍힌 질서에 대한 어떤 노예적 복종에서 해방된 순수한 에크리튀르’, 즉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고 그저 거기에 우뚝 서 있는 순수한 언어라는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 에크리튀르의 영도, 순수한 에크리튀르란 희망·금지·명령·판단 등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순백의’ 에크리튀르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르트가 평생에 추구한 언어의 꿈이었습니다.
_146~147쪽
레비스트로스의 결론은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 ‘문명인’과 ‘미개인’은 그 관심을 갖는 방법이 다를 뿐, ‘문명인’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미개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명은 각자가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부분이 있다’고 준엄하게 충고합니다. (…) 자기가 ‘문명인’이고 세계의 구성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인’의 그런 오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_160~162쪽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됩니다. 그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나’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정신분석의 치료는 대개 오이디푸스 단계의 통과에 실패한 피분석자를 대상으로 하게 되는데 그 작업은 표준적으로는 분석가를 ‘아버지’라고 상정하고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그 ‘아버지’와 공유하고 ‘아버지’에게 승인받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 이 ‘말을 걸고 응답하는 것’이 분석적 대화의 참된 추진력입니다. (…) 정체되어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으로써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뿐만 아니라 우리가 타자와의 인간적 ‘공생’의 가능성을 추구할 때 늘 채용하는 전략입니다.
_213~215쪽
전부터 구조주의 입문서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세상에 시달리는 동안 조금씩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돌아서 다시 책을 읽어보니 이해하기 힘들고 사악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난해했던, 구조주의와 구조주의자들이 ‘말하고 싶어 했던 것’들이 술술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_216~2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