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
レヴィナスの時間論 (2022년)
: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흐르는 시간에 관하여
철학 > 서양철학
우치다 다쓰루 지음 | 박동섭 옮김
27,000원 | 480쪽
ISBN : 979-11-87038-99-3
2023년 8월 30일 출간
✦ 책 소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 그의 대표작 『시간과 타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뒤 파리 철학학원에서 이뤄진 네 차례 강연(1946~1947)을 토대로 엮은 책이다. 레비나스 저작 가운데 가장 얇고 원서로도 80쪽밖에 되지 않지만, 난해하기로 이름 높아 도중에 책장을 덮고 만 독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시간과 타자』를 일본의 지성 우치다 다쓰루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충실히 새기면서” 6년간 독해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가 전후(戰後) 시공간에서 굳이 시간론을 꺼내 든 건, 깊은 고통의 시간을 겪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몸담은 유대인 공동체에 ‘희망의 시간론’을 들려주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레비나스에게 시간이란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익어가는 어떤 것임을, 주체와 타자의 관계임을, 얼굴과 얼굴이 서로 마주하는 가운데 미래가 현재 속에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임을, 저자는 처음 모국어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천천히 더듬어 간다.
✦ 지은이
우치다 타쓰루 (內田樹)
사상가이자 무도가.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고베여학원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가이후칸(凱風館)이라는 고베 소재 아이키도장의 관장으로 아이키도 수련을 지도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철학에 깊게 영향을 받아 반(反)유대주의와 유대교, 그리고 레비나스 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현재는 레비나스 철학과 카뮈의 철학 그리고 일본의 전통 무예인 아이키도에 기초하여 교육론, 무도론, 영화론, 만화론, 신체론, 예술론, 종교론, 미국론, 중국론, 한일론 그리고 정치론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집필 활동과 언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망설임의 윤리학』 ,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 『스승은 있다』 ,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 『교사를 춤추게 하라』 , 『완벽하지 않을 용기』 등이 있다.
✦ 옮긴이
박동섭
독립연구자. ‘○○ 연구자’라는 제도화된 아이덴티티로 살아가는 일의 한계를 실감하며 ‘아이덴티티 상실형 인간’으로 살고 공부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언어를 대중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에스노메소돌로지』 , 『우치다 다쓰루』 , 『상황인지』 , 『동사로 살다』 ,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 , 『회화분석』 , 『해럴드 가핑클』 , 『레프 비고츠키』를 썼고,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 『계산하는 생명』 , 『망설임의 윤리학』 ,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 『수학하는 신체』 , 『수학의 선물』 , 『보이스 오브 마인드』 , 『스승은 있다』 ,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출판사 서평
살아남은 자의 책임
―레비나스 그리고 『시간과 타자』
20세기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철저한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 190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레비나스는 러시아 혁명으로 유대인 박해에 시달리다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수학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되어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고 만다. 친척 대부분을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뒤 파리에 돌아온 어느 날, 그는 철학학원에 모여든 청중을 향해 이런 요지의 말을 남긴다. ‘타자는 이방인이자 과부이고 고아이며,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실제로 그의 아내와 딸은 나치 점령 아래 파리에서 말 그대로 과부이고 고아인 처지였다. 다행히 이들 세 사람은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말이다.
살아남았다는 것. 이에 대한 인식은 전후 레비나스의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화두가 된다. ‘나 자신이 살아남은 의미’를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수많은 친족과 동료를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그가 마땅히 져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누군가가 죽고 자신이 살아남은 데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었다. 남들보다 덕을 쌓아서도 아니고, 신앙이 두터워서도 아니고, 일부러 누가 살려준 것도 아니었다. 그가 죽고 다른 누군가가 살아남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살아남은 자’와 ‘살아남을 수 없었던 자’ 사이에는 실은 결정적인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직면하게 된 비극이다.”(30쪽)
그리하여 다시금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로서, 살아남은 자만이 이행할 수 있는 책무를 지기로 한다. 이것이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힐 『시간과 타자』의 출발점이었다.
시간은 너와 나 사이에서 흐른다
―우치다 다쓰루가 읽는 ‘희망의 시간론’
『시간과 타자』(1979)는 장 앙드레 발이 주관하는 철학학원(College philosophique)에서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네 차례 이뤄진 강연을 토대로 한 책이다. 강연 당시 레비나스에게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통해, 홀로코스트로 해체 위기에 놓인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를 영적으로 재생하게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런데 왜 하필 ‘시간론’이었을까. 전쟁 전의 레비나스는 강연에서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논하기는 했어도 시간론을 본격적으로 꺼내 든 적이 없었다.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가 철학학원 강연 주제로 선택한 ‘시간론’이란 깊은 고통의 시간을 살아낸 유대인에겐 곧 희망의 시간론이었을 것”이며 “그 점 말고는 레비나스가 이 시점에 굳이 시간론을 논할 까닭이 없었다”고 본다.(13쪽)
먼저 『시간과 타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강연의 목적은 시간이란 고립한 단독의 주체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 그 자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13쪽)
여기서 ‘고립한 단독의 주체’라는 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 말이며, 더 나아가서는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기본 토대가 되어온 ‘자기동일적인 주체’ 개념을 겨냥한 말이다. 정신에는 외부가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 모든 것은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기지(既知)라는 것, 인간에게는 타자가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관념이었다.(87쪽)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런 고립된 주체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며, 시간이란 주체와 타자의 관계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는 자기동일적인(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는) ‘나’로부터 벗어나 그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곧 레비나스의 시간론임을 암시하는 문장이다.
젊은 날 레비나스는 후설 문하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당대 독일 최고의 지성 하이데거를 상세히 연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복무한 뒤로 레비나스는 더 이상 그의 조술자 노릇에 머물 수가 없었다. 단순히 하이데거가 나치스에 입당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립된 주체를 내세우고 타자를 무화해버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 자체에, 어쩌면 오랫동안 서구인들의 의식을 지배해온 사상 전반에 홀로코스트의 씨앗이 뿌려져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레비나스는 ‘나’ 아닌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지금/여기’에만 묶여 있는 사람들, 과거를 ‘조금 전의 현재’로 또 미래를 ‘조금 후의 현재’로밖에 보지 않는 사람들, 누구에게도 ‘뒤처짐’과 ‘죄의식’과 ‘응답 책임’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즉 하이데거 존재론의 권역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사람들 손에서 홀로코스트가 만들어졌으리라고 여겼다.(289쪽)
‘시간과 타자’ 강연 무렵 집필한 『실존에서 실존자로』를 통해 레비나스는 기존 서양철학의 권역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깊은 욕구를 이야기한다.(103쪽) 타자, 미지(未知), 현재/현전, 책임(유책성) 등 레비나스 시간론의 중심을 이루는 개념들은 바로 그 욕구에서 파생한 ‘어휘 꾸러미’라고 볼 수 있다. 여성과 비체(卑體), 퀴어, 장애, 비인간 동물 등을 둘러싼 소수자 담론이 달아오르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레비나스 시간론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모국어를 배우듯 레비나스 언어에 다가가기
―우치다 다쓰루식 독해법
『시간과 타자』는 짧고도 난해한 책이다. 40년 가까이 레비나스를 연구해온 우치다 다쓰루 역시 몇몇 개념에 대해서는 “끝끝내 그것을 ‘습득’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448쪽) 그럼에도 『시간과 타자』를 붙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책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이는 책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어떤 메시지의 의미를 잘 모르더라도 그 메시지가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온다는 것, 말하자면 메시지의 수신처가 나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성서 속 하느님이 “아브라함아!” 하고 불렀을 때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답하는 아브라함처럼,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곧 나의 책임임을 『시간과 타자』는 줄곧 강조해왔다.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타자와 나의 관계가 생성되고 거기서부터 사건이 발생하며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처럼 레비나스 읽기’를 시도한다. 의미를 모르더라도, 모른 채로 읽어나가는 것. 이는 어린아이가 모어를 습득하는 방법과도 유사하다. 아이는 엄마가 들려주는 말을, 그 뜻은 모를지언정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발음해 가며 언어를 배운다. 우치다 다쓰루는 그렇게 더듬더듬 ‘레비나스어’에 다가갈 것을 권한다.
요컨대 이 책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은 레비나스어 초급자(한때 『시간과 타자』를 읽으려다 낙오한 독자들, 혹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초심자들)를 위한 독본이다. 저자는 다음 규칙에 유념해 집필했음을 밝히고 있다.
1. ‘알다시피’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2. ‘모르는 것’은 그대로 ‘모른다’고 쓴다.
3. 한참 진행하고 나서 “앞에 쓴 것은 틀렸습니다” 하며 앞서 서술한 이야기를 철회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이, 혹은 『시간과 타자』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 독자가 있다면, 부디 저자의 안내에 따라 끝까지, 함께 책장을 넘겨나가자. 미지의 어휘가 손끝에 닿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목차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예비적 고찰
1. 살아남은 자
2. 후설의 현상학
3. 현상학과 성서
4. 신앙과 시간
5. 유책성 (1)
6. 유책성 (2)
7. 유대적인 앎
1강 읽기
8. 레비나스를 해석하는 규칙
9. ‘실존’의 고독
10. ‘실존자’ 없는 ‘실존’ (1)
11. ‘실존자’ 없는 ‘실존’ (2)
12. ‘실존자’ 없는 ‘실존’ (3)
13.. ‘실존자’ 없는 ‘실존’ (4)
14. ‘실존자’ 없는 ‘실존’ (5)
15. ‘실존자’ 없는 ‘실존’ (6)
16. ‘실존자’ 없는 ‘실존’ (7)
17. ‘실존자’ 없는 ‘실존’ (8)
18. 위상전환 (1)
19. 위상전환 (2)
20. 위상전환 (3)
21. 위상전환 (4)
22. 위상전환 (5)
23. 위상전환 (6)
24. 위상전환 (7)
25. 고독와 위상전환/고독과 질료성
2강 읽기
26. 일상생활과 구원 (1)
27. 일상생활과 구원 (2)
28. 세계에 의한 구원—양식
29. 빛과 이성의 초월 (1)
30. 빛과 이성의 초월 (2)
3강 읽기
31. 노동
32. 고뇌와 죽음
33. 죽음과 미래
34. 죽음과 타자 (1)
35. 죽음과 타자 (2)
36. 죽음과 타자 (3)
37. 외부적인 것과 타자
38. 시간과 타자
4강 읽기
39. 얼굴을 감추는 신
40. 권력과 타자관계 (1)
41. 권력과 타자관계 (2)
42. 원초적인 뒤처짐 (1)
43. 원초적인 뒤처짐 (2)
44. 시간 의식의 성숙 (1)
45. 시간 의식의 성숙 (2)
46. 응답 책임 (1)
47. 응답 책임 (2)
48. 응답 책임 (3)
49. 응답 책임 (4)
50. 에로스 (1)
51. 에로스 (2)
52. 에로스 (3)
53.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리고 타자의 부재
54. 로젠츠바이크 (1)
55. 로젠츠바이크 (2)
56. 로젠츠바이크 (3)
57. 로젠츠바이크 (4)
58. 에로스 (4)
59. 에로스 (5)
60. 에로스 (6)
61. 에로스 (7)
62. 타자와 외부적인 것
63. 풍요로움 (1)
64. 풍요로움 (2)
65. 풍요로움 (3)
66. 풍요로움 (4)
맺음말
약호
주
옮긴이의 말: 오래된 악보를 연주하는 생명의 시간
✦ 책 속에서
지구상 모든 인류가 다 죽고 마지막으로 한 명만 살아남았다고 하자. 이때 그 사람에게 시간은 흐르고 있을까? 나는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계가 시각을 새기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시곗바늘의 이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도 그 사람을 방문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사람이 무얼 말하든 무얼 적든 그걸 듣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없다. 설사 그 사람이 우주가 어떻게 성립했는지에 관해 놀랄 만한 진리를 통찰했다 하더라도 그 진리를 들어줄 상대는 어디에도 없다. 그 사람에게는 받는 것도 증여하는 것도 없다. 그 사람은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_14~15쪽
시간은, 거기에 존재해야 함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희망의 싹이 되는 경우가 있다. 공간적으로는 구원도 지원도 이해도 없는 장일지언정 사람은 시간 속에 몸을 둠으로써 희망과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다. 신앙이란 이처럼 ‘도래해야 할 것’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그것을 그 개인의 영적 확신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철학적 사유의 주제로 삼고 갈고닦아 비유대인을 포함한 보편적 인류의 ‘앎’에 등록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런 연유로 레비나스는 ‘시간론’으로부터 전후의 사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_22쪽
‘살아남은 자’와 ‘살아남을 수 없었던 자’ 사이에는 실은 결정적인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직면하게 된 비극이다.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자를 대신해서 나야말로 죽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존재하는 것의 불확실함’ 속에 우리는 남겨졌다.
_30쪽
메시지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자신이 메시지의 수신인임을 아는 것은 서로 차원이 다른 일이다. 너무 난해해서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일지언정 그 메시지가 자기 앞으로 온 것인지 아닌지는 안다. 눈앞을 캄캄하게 하고 귀를 먹게 하고 살갗을 때리는 것이 다름 아닌 나를 향해서 임박해 온다는 것은 안다.
-63쪽
서구적 앎은 전능인 동시에 무능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밝음 속에 드러내면서 무간지옥의 어둠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을 기지에 환원하면서, 그러한 구조 자체를 통째로 무화해버리는 미지가 절박하게 다가옴을 느끼고는 있다. 서구적 앎은 그러한 양의적인 앎이다.
_72쪽
불면도 치욕도 구토도 자살의 유혹조차도 인간에게는 ‘자주 겪는’ 일상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철학의 정통 계보에서 그런 것이 핵심적인 주제가 된 적은 없다. 그것들은 모두 ‘나에 의한 나 자신의 지배’가 쇠진하는 병적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체의 발판이 미덥지 못하게 되는 경험은 있어도 철학적으로 열리는 거점이 되는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주체의 전능성이 뭔가 문제를 보이는 바로 이 순간에 존재론의 권역에서의 탈출의 이치를 찾아내려고 했다.
-134쪽
나와는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나와는 다른 기준과 틀로 사물을 고찰하고, 나와는 다른 논리로 사유하고, 나와는 다른 어법으로 말하는 ‘나 아닌 존재’가 내 안에서 말하기 시작하는 일이 현실에는 확실히 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더는 단독자가 아니다. 그 동반자와의 ‘끝없는 대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왕복운동을 통해서 시간은 흐른다.
-148쪽
죽음은 맡아둘 수 없다. 죽음은 도래한다. 이 영원한 임박이 죽음의 본질을 형태 짓는다. 주체는 죽음을 맡아둘 수 없다. 죽음에 닿을 수도 없다. 죽음을 앞서 맞이할 수도 없다. 죽음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 아니다. 주체와 죽음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여백’이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틈에 산다. 희망은 죽음에 부가되는 것이…
_239쪽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구체적이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 깊게 파고들고 깊게 침입하고 우리를 근원적인 방식에서 움직이게 하는 바로 그것이 철학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소원하고, 가장 노골적인 것이 가장 감추어져 있고, 가장 일상적인 것이 말로 하기 가장 어렵다.
이것은 레비나스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었다.
_253~254쪽
인간이 ‘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게 된 것은 천상의 신이 인간사에 개입해 재빨리 악을 멸하고 정의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신 스스로가 인간들이 행한 일에 대해 선악의 판단을 내리고 권선징악의 심판을 내렸다면 인간은 영적으로 절대 성숙해지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부정한 일이 저질러지고 도리를 벗어난 일이 판을 치더라도 인간은 이를 멈출 의무가 없다. 신이 모든 것을 처리해줄 테니 말이다. 신이 전능한 세계에서는 인간들에게 무능이 허용된다. 아니, 오히려 무능할 것이 요구된다. 신이 인간 앞에서 얼굴을 감추는 건 그러한 까닭이다.
_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