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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창고에서는 꽃이나 보석보다 훨씬 더 귀한 것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는 당신이 지쳤을 때 힘을 북돋우는 강심제와 강장제가 있다.
(…) 세상살이가 너무 버겁다면, 돈벌이에 휩쓸려 파란 녹이 영혼을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면, 한번 쓰면 없어질 헛것들을 위해 인생을 팔아넘길 위험에 처해 있다면, 여기에서 자신을 바로잡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즐거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_편집자 토레이의 서문에서
소로는 젊은 시절부터 일기에 자신의 마음을 ‘결산’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 소로의 글을 읽을 때면 우리는 평생 복제본으로만 알던 생각의 원본을 마주하는 충격에 항상 대비해야 한다.
_버지니아 울프
1837년 10월 22일, 당시 스무 살이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대학에서 알게 된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의 조언으로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대 후반에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월든 호숫가에 직접 집을 짓고 1845년 7월 4일부터 1847년 9월 6일까지 2년 2개월간 살았지요. 이때 소로는 후일 펴낸 『소로우의 강』과 『월든』의 초고를 썼습니다. 강연 원고와 에세이도 썼는데, 일기에서 관련된 부분을 오려 이 원고들에 가져다 붙였어요. 소로로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으나, 이로 인해 아쉽게도 일기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말았지요. 나중에 소로는 이 일을 후회하고 1850년 11월부터는 저술 과정에서 일기를 잘라 붙이던 습관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일기에 꼬박꼬박 날짜를 적어 넣었습니다.
‘소로의 일기’는 소로가 스무 살부터 세상을 떠난 마흔네 살까지 남긴 39권의 일기 중 가려 뽑아 총 네 권으로 펴내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2017년에 첫 번째 권 『청년편』, 2020년에 두 번째 권 『전성기편』, 2024년 세 번째 권 『영원한 여름편』이 출간되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권은 출간 예정입니다.
‘소로의 일기’ 시리즈에서 소로가 ‘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을 아래에 모아봤습니다. 읽기만 해도 소로를 따라 일상을 일기로 꾸준히 기록해보고 싶어지는 문구들입니다.
(누르면 펼쳐집니다)
그렇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일기를 쓴다
✧ 1837년 10월 22일
“이제 무엇을 할 거니?” 그가 물었다.
“일기는 쓰고 있니?”
그렇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일기를 쓴다.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로마 황제의 방처럼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혼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선 거미조차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마루를 쓸지 않아도, 재목을 나르지 않아도 좋다.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진실이란 나를 더 나아지게 하는 모든 것이다.”
✧ 1840년 7월 6일
하루의 조수여, 파도가 해변에 모래와 조개를 남기듯 이 일기장 위에 퇴적물을 쌓아다오. 그래서 나의 육지를 넓혀다오. 이 일기장은 내 영혼의 물살이 오고 간 달력. 이 바닷가 종이 위에 파도가 조개와 해초를 토해내리라.
✧ 1841년 1월 29일
예측할 수 없는 일 가운데서도 가장 이상한 것이 일기를 쓰는 일이다. 일기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예견할 수 없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내면의 가장 풍부한 창고에 빛을 비추더라도 계산대에 올라오는 것은 그저 조잡하고 값싼 재료들밖에 없다. 하지만 몇 개월이나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그 혼란스러운 더미 속에서 육로를 통해 가져온 중국의 희귀한 유물이나 인도의 보물이 나올지 모른다. 마른 사과나 호박을 줄로 이어놓은 듯한 너저분한 것이 나중에는 브라질의 다이아몬드와 코로만델의 진주를 엮어놓은 보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 1841년 2월 8일
나의 일기는 추수가 끝난 들판의 이삭줍기다.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들에 남겨져 썩고 말았을 것이다. 먹기 위해 살듯이 일기를 쓰기 위해 산다면 환영할 만한 삶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매일 일기를 쓰는 이유는 신들을 위해서다. 일기는 선불로 우편요금을 내고 신들에게 매일 한 장씩 써 보내는 나의 편지다. 나는 신들 세상의 회계사다. 밤마다 장부에서 원부로 그날의 계산을 옮겨 적는다. 일기는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길가의 나뭇잎이기도 하다. 가지를 붙잡아 잎 위에 나의 기도를 적는다. 그러고 나서 가지를 놓아준다. 가지는 제자리로 돌아가 잎에 적힌 낙서를 하늘에 보여준다. 일기를 내 책상 안에 고이 간직해두지 않았더라면 나뭇잎과 마찬가지로 만인의 것일 수 있다.
일기는 강변에서는 파피루스 같고, 초원에서는 푸른 서판 같으며, 언덕에서는 양피지 같다. 가을날 길을 따라 떼 지어 손을 흔드는 잎사귀처럼 어디에서나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까마귀나 오리, 독수리가 펜에 꽂을 깃촉을 물어다준다. 바람은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잎을 흔든다.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지지 않을 때에는 흙탕과 진흙 속을 더듬어 갈대로 글을 적는다.
나의 일기는 우연히 휘갈겨 쓴 글들로, 지진이나 일식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들을 기념한다. 저기 항아리에 들어 있는 시든 잎처럼 여기저기에서 주워 모은 것으로, 산과 들, 숲과 늪지를 뒤져 찾아낸 것이다.
✧ 1850년 11월 16일
나의 일기장이 사랑의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일기에 적고 싶다. 나의 열망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가을을 향해 가지만, 아직은 따뜻한 태양과 봄기운 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새싹과 같다. 비록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나 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여물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느끼고만 있을 뿐 정체를 알 수는 없다. 단지 땅이 기름지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지금이 나에게는 파종기다. 이제 싹을 틔워도 좋을 만큼 충분히 오래 땅속에 묻혀 있었다.
✧ 1852년 1월 22일
내가 겪은 일 중 일부를 추려 글로 적어둔다. 글 쓰는 일이 격려가 되어 마침내 부분들이 전체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떠올리게 되는 갖가지 생각과 느낌을 붙박아서 잊지 않게 하는 일은 분명 하나의 직업으로 따로 떼어놓아야 할 값어치가 있다. 미완성의 그림이라도 꾸준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림의 완성된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는 일과 같다. 자신이 지닌 가장 고귀한 생각을 자주 정성을 기울여 떠올려 보라. 마음에 들어 각별히 적어놓은 하나하나의 생각이 밑알과 같다. 그 곁에 점점 더 많은 알이 쌓이게 될 것이다.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은 앞으로 더 많은 생각, 더 나은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얼개다. 이것이 글을 쓰거나 일기를 적는 습관의 중요한 가치다. 이로 인해 가장 좋았던 때가 생각나고, 그 기억으로 자극을 받게 된다. 나의 생각은 나의 동반자다. 하나하나의 생각이 개성을 지닌 독립된 존재이며 인격이다. 따로따로 떨어진 생각들을 한곳에 나란히 적어둔다. 이렇게 한곳에 나란히 적힌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나란히 놓인 생각들이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자세히 논할 필요가 있는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어준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살을 에는 추운 날씨다. 눈 덮인 벌판에 산들바람이 불어와 차라리 잔잔히 물결치는 여름 바다와 같은 모습이다.
✧ 1852년 1월 27일
나는 일기에 적은 생각들을 토막 내어 수필집으로 묶어 내기보다는 일기 그 자체로 출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일기의 글은 지금도 여전히 삶과 생생히 맞닿아 있다. 그러니 글을 읽는 사람에게 에둘러 간다는 느낌은 주지 않을 것이다. 일기가 다른 글보다 덜 인공적이고 더 단순하다. 일기가 아니었다면 나의 스케치를 담을 적당한 그릇을 달리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단순한 사실과 이름과 날짜가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전달한다. 꽃다발에 묶인 꽃이 초원에 핀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초원의 꽃을 따기 위해서 우리는 발을 적셔야 한다. 고정된 형식에 갇힌 아름다움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1852년 1월 28일 내 생각을 담기에 일기만큼 좋은 그릇은 없는 것 같다. 수정은 동굴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는 교훈을 갖춘 우화다. 아이들은 우화 자체로만 읽으나 어른들은 우화에서 아울러 교훈을 읽어낸다. 우화로 이야기된 진실은 추상적임에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으므로, 추상적인 진술이 갖는 최고의 이점을 누리게 된다. 여러 생각을 이을 접착제로 우화가 아닌 그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겠는가? 손질한 흔적 없이 여러 생각을 이을 방법이 우화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이 방법을 쓰지 않았고, 몽테뉴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일기 형식으로 여행기를 쓰긴 했으나, 누구의 생활도 매일매일 일기로 적을 만큼 그렇게 풍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1855년 2월 5일
일기를 쓸 때는 간단하게라도 그날의 날씨를 적어놓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날 날씨의 특징이 우리 기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때 그렇게 중요했던 일이 내 기억에 하잘것없는 일로 남게 될 리는 만무하다.
✧ 1856년 1월 24일
일기는 좋았던 일이나 그럴듯한 말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경험과 성장을 적는 그릇이다. 나는 가끔씩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려보곤 한다. 대화 도중 이야기하자마자 곧 까먹은 것들이다. 그런 말들은 내가 일기에 적어놓은 글보다 훨씬 더 잘 읽히긴 할 것이다. 고통이나 기쁨을 주는 일 없이도 내게서 쉽게 떨어져나가는, 오래전 경험이 무르익은 메마른 열매이다. 일기의 매력은 신선하기는 하나 아직 숙성되지 않아 얼마쯤 초록이라는 점에 있다. 나는 일기를 쓸 때 내 때를 털어내면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떠올릴 여유가 없다. 그저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지 떠올릴 따름이다.
✧ 1857년 3월 27일
나는 부득이 내 일기에 두 종류의 글을 적는다. 먼저 오늘의 사건과 관찰이다.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은 사건을 되새겨보고 빠뜨렸던 사실들을 적어 넣는다. 빠뜨렸던 것일수록 더 시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중요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처음에는 나를 매료시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이처럼 오늘의 사람과 사물이 내일의 기억 속에서 더 진실하고 공정하게 드러나곤 한다.
소로의 일기: 청년편
소로의 세계를 여행하는 법
윤규상 옮김 | 2017년 7월 12일 출간
400쪽 | 15,800원
『월든』의 시작은 일기였다. 소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통찰, 사회에 대한 철학을 고스란히 자신의 일기에 담았다. 이 사색의 결과물은 소로의 모든 작품의 자료가 되고 시대를 뛰어넘는 삶의 지혜가 되었다. 숲속의 은자, 초월주의자, 자연주의자 등 소로에게는 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르지만, 소로는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간 독창적인 천재였다.
이 책에 실린 조류학자 브레드포드 토레이의 서문과 사상가 랠프 왈도 에머슨의 「소로 소전」은 소로의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을 전해준다.
*일기 기간: 1837~1851년 (20세~34세)
소로의 일기: 전성기편
자연의 기쁨을 삶에 들이는 법
윤규상 옮김 | 2020년 7월 30일 출간
404쪽 | 16,500원
삶에서 전성기를 맞은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어떤 걸 보게 될까.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월든』의 교정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세상에 내보이기까지의 3년 동안 소로가 차곡차곡 써 내려간 일기에 비친 모습은 삶의 ‘정점’이란 봉우리에 오른 정복자와는 거리가 멀다.
소로는 앞선 실패와 좌절을 통로로 삼아 자연 가까이에서 삶을 꾸리는 마을 사람들, 주변을 노니는 네발짐승과 때를 맞춰 오가는 철새와 풀벌레들, 여러 꽃나무와 상록수 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 속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 소박한 자리를 벗어나기보다 그곳을 더 꾸준히 바라보고 기록함으로써 삶을 더 풍부하게 가꾼다. 『소로의 일기: 전성기편』은 소로라는 위대한 작가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맑게 비추는 선물 같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일기 기간: 1852~1854년 (35세~37세)
소로의 일기: 영원한 여름편
일상을 관찰하며 단단한 삶을 꾸려가는 법
윤규상 옮김 | 2024년 6월 21일 출간
332쪽 | 17,000원
소로의 문장력이 최정점에 달한 시기에 쓰인 일기로, 산책 마니아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인 소로가 돈을 들이지 않고 영감과 즐거움을 얻는 방법, 단순함으로 단단한 삶을 꾸려가는 비결 등을 가르쳐준다. 동시에 어떤 혹독한 겨울 속에도 ‘영원한 여름’이 존재한다는 희망과 치유의 감각이 가득한 한 권이다.
자신에게 진정 가치 있는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기술이란 어떤 것일까?
자연과 일상을 다각도에서 관찰하며 발견의 기쁨을 누리는 소로의 눈을 통해 독자 또한 평범한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다.
*일기 기간: 1855~1857년 (38세~40세)
‘소로의 일기’에는 ‘밤새(nighte warbler)’라는 정체불명의 새가 등장합니다. 소로는 물론, 어떤 독자나 조류학자도 이 새가 어떤 새인지 알지 못한답니다. 소로는 새를 사랑하는 아마추어 조류학자였지만, 인간의 학문적 체계에 따라 자연을 분류하고 정의 내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을의 들, 산, 절벽 등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여 부르곤 했지요. 소로는 ‘밤새’ 또한 굳이 면밀히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것. 소로는 불가해한 인간 삶과 자연의 수수께끼를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855년 5월 12일
리의 절벽 아래에서 올 처음으로 영원에서 영원을 노래하는 고요하고 차분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절벽 꼭대기에 작고 가느다란 끈끈이대나물이 수없이 돋아났다. 여전히 흰목참새가 날아다닌다.
해 지기 직전, 그 올빼미 둥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숨을 고르면서 어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반 시간 정도 지나자 놀랍게도 숲 깊은 곳 온갖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숲의 복도에 확성기라도 매단 것일까. 까마귀가 까악까악 우는 소리, 늪에서 봄의 청개구리가 떼 지어 삐익삐익 우는 소리, 한 마리 나무두꺼비가 개골개골 우는 소리, 가마새가 지저귀는 소리, 개똥지빠귀가 요릭요릭 하고 우는 소리, 멀리서 알락해오라기가 우는 소리, 밤새(night-warbler)와 흑백아메리카솔새의 울음소리, 암소들이 음매음매 우는 소리, 저녁식사 시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이 온갖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소리처럼 따로따로 또렷이 들린다. 이런 숲에 자고새와 붉은꼬리말똥가리와 비명올빼미가 둥지를 틀고 앉았다.
랠프 왈도 에머슨은 소로에게 ‘밤새’를 잘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소로가 자연을 관찰하는 데 쓴 또 하나의 무기는 끈기다. 그는 떠나간 새, 파충류, 물고기가 다시 돌아와서 하던 버릇대로 왔다 갔다 하다가 호기심에 차서 그에게로 와 그를 바라볼 때까지, 앉아 쉬던 바위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소로와 함께 걷는 건 커다란 즐거움이자 특권이었다. 그는 여우나 새에 못지않게 이 고장을 잘 알았고, 자신이 찾아낸 길로 자유롭게 지나다녔다. 그는 땅과 눈 위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고서 어떤 짐승이 자신보다 앞서 길을 지나갔는지 알아냈다. 누구라도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나, 그 보상은 컸다. 그는 주머니에 일기장과 연필, 조류 관찰용 쌍안경, 현미경, 잭나이프, 삼실을 넣어두고, 식물을 끼워 넣을 낡은 음악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산책을 다녔다. 밀짚모자를 쓰고, 튼튼한 신발을 신고, 질긴 회색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떡갈나무 관목 숲이나 청가시나무 숲을 뚫고 나아가고, 매나 다람쥐의 둥지를 찾아 나무 위를 기어 올라갔다. 또 수생 식물을 찾아 물웅덩이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튼튼한 두 다리는 그의 갑주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소로는 조름나물을 찾고 있었다. 큰 물웅덩이 건너편에 돋아난 조름나물을 본 그는 조름나물에 핀 작은 꽃들을 살펴보고 나서 꽃이 핀지 닷새가 지났다고 말했다. 그는 왼쪽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일기장을 꺼내더니 언제 만기가 돌아오는 지를 살피는 은행업자처럼 거기에 적힌, 이날 꽃을 피워야 할 모든 식물들의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복주머니꽃은 내일이 만기였다. 그는 이 늪에서 실신했다가 깨어나더라도 식물을 보고 이틀 안에 지금이 한 해 중 어느 날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자신했다. 딱새가 날더니 곧 이어 참한 콩새가 날아올랐다. 그는 텀벙거리다가 그 눈부신 주홍 빛깔에 눈이 똥그래졌다. 소로는 그 맑고 고운 울음소리를 풍금조의 노랫소리에서 쉰 목소리가 제거된 소리에 견주었다.
곧 이어 그가 “밤새(night-warbler)”라고 부르는 새의 노래가 들려왔다. 그가 지난 12년 동안이나 찾아다녔으나 아직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새였다. 언제나 나무나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야 이 새를 얼핏 보고서 찾아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고 한다. 밤에 우는 소리와 낮에 우는 소리가 다른 유일한 새였다. 나는 그에게 이 새를 꼭 찾아내 기록에 올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찾아내야 할 짐승들은 남김없이 찾아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더니 그가 이렇게 응답했다.
“평생을 찾아다녀도 찾지 못하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떼로 모여 모이를 쪼아대지요. 무언가를 꿈꾸듯 찾아다녀 봤자 찾는 그 순간에 스스로 그 밥이 되고 말아요.”
_「소로 소전」, 랠프 왈도 에머슨
편집자 브래드포드 토레이가 말하는, 미스터리에 호의적인 소로
소로의 일기가 이런 문제 때문에 새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별로 흥미롭지 않을 거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50여 년 전 아마추어 조류학자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썼는지 보여주고, 특히 겨울 저녁에 풀어야 하는 조류학적 문제는 무엇인지 알려주므로 더 흥미로울 수도 있다.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은 여기 일기에 나오는 글들을 재량껏 대조해봄으로써 저 유명한 ‘밤새(night-warbler)’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밤새’가 휘파람새만큼이나 흔한 새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새는 아름답게 노래하며 날아다니는 두어 종의 평범한 작은 새가 아니었을까 싶다.
새의 정체가 무엇이었든 간에, 소로에게는 이 새가 문학적 상상력을 북돋우는 데 분명 쓸모가 있었다. 에머슨은 소로에게 이 새를 기록에 올릴 수 있도록 애써 달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소로는 이런 당부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
소로는 어떤 종류의 무지에 대해서는 꽤나 호의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소로는 ‘밤새’와 같은 자신의 조류학적 미스터리와 관련하여, 자신의 좋은 점은 그들의 특징을 충분히 알기 전까지는 그 이름을 굳이 알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이런 글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당당히 말하고 있다.
_『The Writings of Henry David Thoreau』의 서문, 브래드포드 토레이
소로는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늘 산책을 하며 사색을 즐기는 산책 마니아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일상과 자연을 부지런히 관찰하며 다채로운 깨달음과 큰 기쁨을 얻곤 했지요.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을 단단하고 풍성하게 꾸려갈 수 있었습니다.
‘소로의 일기’에는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한 소로의 흥미로운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150년 전 쓰인 일기임에도 요즘 감각에 뒤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고 독창적이에요. 마치 한 비범한 인간의 매우 사적인 백과사전을 엿보는 기분마저 들게 됩니다. 소로의 낮과 밤은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그는 어떻게 세상 만물에서 개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삶에서 어떤 알맹이를 포착했을까요? ‘소로의 일기’를 통해 그가 세상을 바라봤던 방식을, 감각을 예리하게 단련했던 방법을, 그럼으로써 지금 눈앞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냈던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름
✧ 1851년 7월 21일
저녁 8시 30분. 이런 여름날에는 낮보다 저녁 시간의 마을 거리가 훨씬 흥미롭다. 온종일 건초를 만들다가 장을 보러 나온 이웃들과 농부들이 거리에서 잡담을 나눈다. 이 집 저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주민들은 한두 시간 짧게나마 저마다의 성품에 맞는 일에 몰두한다.
✧ 1853년 5월 15일
수영이 피어나 은빛으로 엷게 물든 풀의 물결과, 미나리아재비 꽃, 은백색 양지꽃, 첫 사과나무 꽃이 우리를 또 다른 계절로 이끈다. 어느덧 카스텔레야(인디언페인트브러시)가 활짝 꽃을 피웠다. 가는 잎 20센티쯤 위에 불꽃처럼 피어난 이 꽃은 초원과 맞닿은 언덕 가장자리, 즉 언덕 발등에 서서 그 강렬한 색으로 7월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열기를 약속한다. 이제 들판이 좀 더 여름에 가까이 누워 있다. 노랑이 봄의 색이라면, 빨강은 한여름의 색이다. 우리는 옅은 금빛과 초록빛을 거쳐 미나리아재비의 노란빛에 이르고, 주홍을 거쳐 격렬한 붉은 7월, 즉 붉은 수련에 이른다.
(…)
어떨 때에는 여름의 작용이 하찮게 느껴질 때도 있다. 몹시 바쁘게 윙윙거리며 오가는 꿀벌을 붙잡고, 도대체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다. 나는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한 미나리아재비로부터 다년생 초목에게로 건너뛸 수 있다. 귀뚜라미는 가을을 재촉하는 가수다. 그의 노래는 계절을 초월한다. 아니면 계절에 한참 뒤처져 있다. 일종의 고귀한 자각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시간과 공간을 소멸시킨다. 여름은 시류에 편승하는 자들의 계절이다.
✧ 1853년 7월 24일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름을 생각하면 땅광과 같은 서늘함이 연상되곤 한다. 아마 무성한 잎의 짙은 그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사이에는 작물이 가뭄을 겪더라도 6월처럼 심각하게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 이슬 맺힌 잎들이 땅에 그늘을 드리운다.
✧ 1854년 8월 7일
오후에 월든 호수에 가다. 리아트리스가 꽃을 피웠다. 여전히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서늘한 기운이 담긴 산들바람이 분다. 시스투스가 자라는 들판을 걷는다. 땅과 풀잎에서 햇빛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지금 쑥국화가 한창이고 일찍 핀 미역취의 노란빛이 짙어진다. 여름에 우리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흙의 일부가 된다. 이제 우리는 얼마간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흙 위를 걸어보려 한다. 지나간 몇 년이 생각난다기보다 그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나의 존재가 생각난다.
낮과 밤
✧ 1840년 6월 24일
해는 이미 15분 전에 졌지만 해의 광선이 아직 남아 거의 중천까지 비춘다. 잠시 잠결에 빠져들 때 서쪽에서 빛나는 내일이 희미한 아침의 예감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안개가 낮에 생긴 먼지처럼 서쪽에서 천천히 굴러온다. 저쪽 숲에서는 해가 다시 솟을 때까지 하늘 지붕을 떠받칠 연기 기둥이 올라간다. 여기 가만히 누운 풍경이 내게 이렇게 일러준다. 모든 좋은 것은 기다리는 이의 몫이고 언덕 너머 서쪽으로 서둘러 가기보다는 여기 이 자리에 남아 있어야 더 빨리 새벽을 맞이할 수 있다고.
뒤쪽 숲의 숨소리가 점점 커진다. 왜 밤은 허둥지둥 달려올까? 저기 다리 위를 구르는 짐마차는 낮이 밤에게 보낸 배달부다. 하지만 그 급보는 봉인되어 있다. 붉은색은 대낮에 속한다. 아니면 낮 뒤꿈치의 색이라 해도 좋다. 그가 지금 서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우리는 그가 오고갈 때에만 잠시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고결한 개는 별을 향해 짖는다. 나 또한 너처럼 낯설면서도 친숙한 밤을 홀로 걷는다. 나의 목소리도 저 상냥한 하늘에 울리고, 짖는 나에게는 내 목소리만이 울려온다. 밤 10시다.
음악
✧ 1857년 1월 15일
음악에는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 모두는 대체로 절망에 빠져 산다. 삶이 그러하기에 자살로 몰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많은 사람에게, 어쩌면 사람들 대부분에게 삶은 참기 힘든 것이라서 죽음이 두렵지만 않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죽음을 택할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어떤 선율을 들으면 어느 누구도 이야기한 적 없고, 어떤 성직자도 설교한 적 없는 삶을 대뜸 떠올리게 된다. 내가 어떤 선율이 보여주는 앞날을 착실히 만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내 삶의 장은 어떤 죽음이나 실망도 없는 걷기 좋은 가없는 벌판이 된다. 온갖 하찮음과 천박함이 사라진다. 나는 어떤 짓을 해도 온당해진다. 삶의 장이 이렇게 넓어지면 어떤 까다로움도 사라진다. 이 선율에 비추어 보면 너도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실 우리 자신을 넘어선 어떤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문학
✧ 1850년 11월 16일
우리 주의를 끄는 문학은 길들여지지 않은 문학이다. 따분한 문학이란 길들여진 문학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명칭일 따름이다. 읽는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신화와 경전, 『햄릿』, 『일리아스』 등 모든 고전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로운 야생 정신이 숨 쉬고 있다. 그 정신은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기교로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좋은 책은 거친 원시 자연 속에서 자라난 이끼나 버섯처럼 신비롭고 기이하며 향기롭고 기름지다.
✧ 1852년 4월 2일
우드척이 사는 굴집 앞을 지나쳐 갈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가장 슬기로울 수 있는 순간에 소위 문명이라는 것들이 내게 영향을 미친다. 물론 문명 세계는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안락한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 친구를 두고 있다. 그중 일부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또 몸을 덥힐 화로도 있다. 그러나 한밤중에 일어나면 문명 세계가 완전히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니, 낮에 얼마간 생각에 빠져있더라도 문명 세계는 잠든다. 우리의 문학을 보라. 알려지지 못할까 봐 조바심치는 얼마나 가련하고 하잘것없는 사교용 문학인가. 작가는 독자들을 걱정하지 못해 안달한다. 그러다가 결국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출판업자 곁에 바짝 붙어 서서 교정지를 고치고 또 고친다. 이승에서 줄지어 행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니, 우리 모두 함께 천당에 가는 편이 좋으리라. 좋은 사람, 즉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은 좋은 시민이 된다는 뜻이다. 인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제도다. 인류는 대부분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다. 나는 시험 삼아 길동무에게 “당신은 인간을 잊을 수 있는가? 이 세계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가?”라고 묻고 싶다.
✧ 1856년 9월 2일
아버지는 존 레그로스 씨에게 이렇게 나라가 위기에 처한 순간에 정치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물었다. 레그로스 씨는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요일이면 장작 쌓인 헛간에 가서 신문을 읽는다. 이런 것들이 문학을 즐기는 첫 시작이다. 새로운 나라에 뿌려지는 문학의 첫 씨앗이다. 그의 손자는 『바가바드기타』 같은 글을 써낼지 모른다.
나는 위대한 시와 하찮은 시의 차이를 이렇게 생각한다. 위대한 시는 뜻이 말을 앞질러서 말 밖으로 흘러넘친다. 반면에 하찮은 시는 말이 뜻을 앞지른다.
산책
✧ 1855년 11월 7일
나는 오늘처럼 조용하고 어둡고 이슬비 내리는 오후에 산책 나가길 좋아한다. 이런 날에 산책이나 여행을 하면 맑은 날보다 생산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느낌이다. 안개비로 시야가 좁아지고, 강물이 한없이 부드러워지면서 모든 것이 고요하여 내 안을 살피고 싶어진다. 감각이 햇빛과 바람에 굳어지지 않기에 방 안에 고요히 머물 때와 마찬가지로 예민해진다. 생각이 한데 모여 단단해진다. 주민들 또한 날씨 탓에 집에 틀어박혀 있기에 고독 또한 실재한다. 이 안개가 벽이나 지붕과 마찬가지여서 나는 집 안에 앉아 있는 기분으로 걷는다. 보이지는 않으나 다리를 넘어가는 마차 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게 들린다. 다른 소리들도 마찬가지다. 근처 사물들을 올곧게 살피기에 무엇을 보든 마음이 가라앉는다. 구름과 안개가 시야를 가려 감각이 흩어지지 않기에 살피고 생각하는 힘이 한결 강해진다. 세계와 삶이 단순해진다. 유럽과 동양이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 1857년 4월 16일
한 달 전쯤 우체국에 갔을 때 약간 귀가 먼 에이블 브룩스 씨가 다가와서는 우체국 안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자네 모임은 꽤 큰 모임이지, 안 그래?”
나는 무슨 말을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로 “그렇겠지요, 뭐” 하고 얼버무렸다.
“스튜어트도 거기 꼈지. 콜리어도 그중 하나이고, 에머슨 그리고 우리 집에서 하숙하는 풀시퍼도 있고 말이야. 내 생각으로는 채닝도 거기 나가는 것 같은데.”
“아, 산책 좋아하는 사람들 말이군요.”
“그래, 자네들도 단체 아닌가? 모두 숲에 가지, 안 그래?”
“아니, 아저씨네 숲에 무슨 문제라도?” 하고 내가 되물었다.
“뭐, 그런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아. 자네 패거리가 그런대로 영리한 축이라고 믿으니까” 등등.
샌번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그가 처음 콩코드 마을에 와서 브룩스 씨 집에 하숙을 정했을 때 마을에 어떤 종파가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브룩스 씨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단다.
“셋 있어. 유니테리언파와 정통파, 그리고 월든 호수파.”
✧ 1857년 10월 7일
오래 걸을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말에 태워 끌고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마구간지기를 만나고 지저분한 마구를 만지지 않을 수 없다. 승마가 즐겁다고 생각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내 시간을 그들에게 맞춰 아침나절을 보내면 공기의 부드러움과 그날의 약속으로 나도 약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들은 오후가 되면 삶은 고기만두처럼 축 늘어진다. 걷지 못하면 차라리 낮잠이나 자고 나를 놔주면 좋을 것을. 하지만 그들은 앉아 있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내비치며 내게 2시쯤 다시 오라고 말한다. 봄날같이 화창하고 찬란한 오후에 그들은 햇빛을 등지고 앉아 의자를 부서뜨리고 집을 닳게 만들며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내 알 바 아니라는 태도를 취한다.
눈
✧ 1840년 7월 10일
우리는 눈을 통해 그 사람을 안다. 한 사람의 눈은 어떤 사람의 눈과도 다른 고유한 것이다. 눈은 가족이 아닌 개인의 특징이어서 쌍둥이도 서로 다르다. 눈 속에 모든 이의 비밀이 들어 있다. 성격을 바꿀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눈의 표정도 바꿀 수 없다. 한 사람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이 다른 특징들을 결정하고 또한 그 사람을 독창적으로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떤 사람의 모습, 태도, 열등한 면만을 보고서 다른 사람과 착각할 때는 사실 서로 닮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치면 의혹은 즉시 사라지고 만다. 눈에는 모든 특징이 스며들어 있다. 눈은 독자적인 축을 선회하므로, 우리가 자신의 의지를 마음대로 할 수 없듯 눈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땅의 축이 하늘의 축과 일치하듯, 눈의 굴대가 바로 영혼의 굴대인 것이다.
진흙거북
✧ 1854년 8월 27일
아침에 깨어나니 진흙거북을 보고, 그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꿈속의 일이었는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 아리송하다. 천천히 머리를 들고 베갯머리 너머로 곁눈질하여 탁자 아래에 뒤집힌 채 놓여 있는 커다란 진흙거북의 껍데기를 본다. 그 껍데기에서 툭 튀어나온 늑골이 보인다. 내가 깨어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깨닫는다. 의혹을 느끼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훌륭한 천재성은 이 사실에 얼마나 거창한 의의를 부여했던가. 우리가 깨어나면서 처음으로 접하는 대상이 속이 빈 진흙거북의 껍데기라니! 내가 이로 인해 속취(俗臭)가 물씬 풍기는 존재로 바뀐 것은 아닐까? 아니, 이것이 내가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명과 인격을 보호해 주던 이 껍데기가 지금은 거꾸로 뒤집힌 채 아무런 쓸모없이 놓여 있다. 나는 이 껍질에 난 구멍 속으로 어떤 종류의 거북이라도 집어넣을 수 있다. 이 거북 또한 한때는 알로 유아기를 보냈다. 나는 진흙거북의 껍데기를 보고 난 다음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확실히 깨닫는다. 이보다 더 땅에 속한 사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진흙거북은 등으로 대지를 나른다. 그의 삶은 동물과 식물의 삶 사이에 있고, 씨앗처럼 땅속 깊이 심어져 여름 내내 땅속에서 자란다. 진흙거북이 동물의 삶 못지않게 식물의 삶을 사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소로우의 강
윤규상 옮김 | 2012년 11월 12일 출간
524쪽 | 16,000원
소로의 첫 작품으로, 그가 가장 공을 들이고 사랑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 함께했던 책.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의 국내 최초 완역본으로 역자가 1년 반 이상 심혈을 기울여 우리말로 옮겼으며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하고도 친절한 역주를 더했다.
소로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여동생 소피아에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의 책 읽는 소리를 듣던 그는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 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씨앗의 희망
『월든』의 작가 소로가 들려주는 숲의 언어
이한중 옮김 | 2004년 5월 18일
248쪽 | 종이책 품절 | 교보문고 전자책 판매중
『월든』의 작가이자 녹색사상가이며 자연학자인 헨리 데이빗 소로의 생애 마지막 책(1862년 3월~5월)으로, 사후에 발간되었다. 자연 생태에 대한 과학적인 관찰은 물론, 자연의 섭리, 나무와 씨앗의 일생에 대한 풍부한 설명에서 소로만의 인생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일상을 빨리빨리 해치우듯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꾸준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숲(자연)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여유를 가지라고 충고한다. 소로가 생의 황혼기에서 차분하게 그려낸, 질기게 천천히 생명을 이어가는 숲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