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 상상되지도, 계산되지도 않는 여성의 일과 시간에 대하여
사회과학 > 여성학
이소진 지음
16,000원 | 288쪽
ISBN : 9791187038795
2021년 11월 12일 출간
✦ 책 소개
정부의 ‘52시간제’ 도입에 맞춰 국내 굴지의 대기업 H그룹에서는 임금 감소 없이 하루 1시간의 노동시간 단축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H그룹 소속 B대형마트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고 있었다. 마트 캐셔 노동자들에게는 ‘워라밸’이 필요 없는 걸까? 최저임금을 받는 이 여성들에게는 1시간치 임금이 훨씬 절박한 걸까?
캐셔 노동자가 되어 직접 이들과 같은 자리에서 일하며,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저자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들이 빼앗긴 것은 돈보다도 ‘시간’임을 알게 됐다.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보이지 않는 여자들’의 시간과 일, 삶을 생생하게 포착한 이 책은 사회와 노동시장이 여성을, 이들의 일터에서 여성됨, 나이 듦, 삶과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성별화된 노동시장의 구조 속에서 특히 여성에게 노동시간 단축이 쉽게 ‘선물’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일-생활 균형’이라는 이상을 빚는 문법은 무엇이며, 그 문법이 왜곡하는 것은 무엇인지, 장시간 노동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선 우리가 중심에 두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 추천의 글
노동시간 단축은 장시간 노동이라는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꾼 노동운동의 승리로 간주된다. 저자는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으로 이 승리가 모든 노동자에게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 특히 재취업 중년여성들에게는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여성노동자들의 시민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책으로 추천한다.
_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차이를 둘러싼 여성주의 이론과 한국 노동시장의 상호작용을 예리하게 포착한 모범적인 연구이자 일상의 이야기이다. 여성의 차이, 여성노동자의 차이 특히 연령을 둘러싼 차이는 나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현실이다. 이 책은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권력의 장소를 드러냄으로써 한국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정체성의 정치로 흐를 수 있는 취약성에 단호히 저항한다.
_정희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 지은이
이소진
블루칼라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동국대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학과 공부보다는 중앙동아리 ‘맑스철학연구회’와 학생운동모임 ‘달려라진보’에서 학생운동에 전념하다 간신히 졸업했다. 졸업 직전 학과 내 성폭력 사건 해결에 나선 것을 계기로 여성의 삶, 그리고 엄마의 삶과 나의 삶을 이해하는 언어로서 여성학을 연구하게 됐다. 2019년 참여관찰 연구인 「표준노동시간 단축이 중년여성의 일과 생활에 미치는 영향: B대형마트 캐셔를 중심으로」로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은 이 논문을 재구성하고 보완해 펴낸 첫 책이다. 현재는 연세대 사회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마트 캐셔직을 비롯한 블루컬러 여성 노동과 중년 여성 노동자, 청년여성 등 기존 노동연구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주목하며 노동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경험이 언어가 될 때』,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이 있다.
✦ 출판사 서평
노동시간 단축은 ‘모두’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일-생활 균형’의 자격은 무엇이며, 주인은 누구인가?
팬데믹이 불러온 여러 변화 중에도 재택근무와 탄력, 유연근무제 도입 확산은 장시간 노동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논의를 앞당기는 데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대선 주자들의 공약으로 노동시간 단축이 거론되고,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잠잠했던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는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공론장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껏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갈 때마다 노동시간 단축을 원하고, 그로 인해 삶의 변화를 맞을 이들은 특정 집단으로 상상돼 왔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표어는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생활시간으로, ‘워라밸’은 ‘칼퇴근’과 저녁 회식 거부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청년층의 문화로, ‘일-가정 양립’에서 ‘일-생활 균형’으로 이름을 바꾼 유연, 탄력근무제는 출산이나 육아로 자녀 돌봄이 시급한 여성노동자의 필요를 충족하는 무언가로 상상된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저녁 있는 삶’을 위해 저녁 밥상을 차리는 사람, ‘칼퇴근’ 개념도 희박한 일터에서 일하며 자녀 돌봄에서도 ‘졸업’한 중년여성에게 노동시간 단축은 어떤 의미일까? 살림을 꾸리면서도 시간급으로 최저임금을 받으며 ‘자투리 시간’에 일하는 여성들에게도 노동시간 단축이 여가와 높은 삶의 질을 선물할 수 있을까? 노동시장이 상상하는 노동자, 덜 일할 자유와 자격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노동시간 단축은 정말 ‘모두’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저임금과 시간 빈곤의 이중 부담을 지는
워킹맘, 경단녀 그리고 그 뒤의 여성/일자리의 현실
‘워킹맘’, ‘경단녀’라는 표현이 낯설었던 때부터 함바집, 옷 가게, 공단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로 일하며 선택할 수 없는 연장근로가 일상이던 엄마를 봐 왔던 저자는 집회에서 만난 중년여성 마트 노동자들이 모기업에서 실시한 주 35시간제에 반대한다는 말을 듣고 의아했다. 엄마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하루 1시간의 여유가 왜 이 엄마 또래 ‘아줌마’들에게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인지, 1시간치 임금이 그렇게 절박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마트 캐셔가 되어 이들과 함께 일하고, 이들의 생활을 직접 듣게 된 저자는 이들이 빼앗긴 것이 그저 1시간치 임금’이 아닌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기업 사무직 노동자들과 달리 이 여성들은 하나같이 “1시간이 줄었지만 삶의 질이 높아지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불규칙했던 근무 스케줄은 더욱 불규칙해졌고, 출근 시간을 전날까지 알 수 없는 날도 늘었다. 노동력 부족을 메우겠다고 동원된 셀프 계산대와 초단시간 아르바이트는 노동강도를 더 높이기만 했다. 저임금을 감내할 만큼 일의 의미를 찾게 했던 일터에서의 교류도 사라졌다.
참여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이 ‘보이지 않는 여자들’의 시간과 일, 삶을 생생하게 포착한 이 책은 사회와 노동시장이 여성을, 이들의 일터에서 여성됨, 나이 듦, 삶과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질문한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과 ‘일-생활 균형’이라는 이상을 ‘아줌마’들의 시간과 엇갈리게 만드는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를 살핀다. 더불어 노동시간 단축이 ‘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특수한 임금 제도, 장시간 노동문화에 각인되어 있는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 ‘일-생활 균형’과 성별화된 노동 유연화 문제를 차례로 다룬다. 그리고 이 같은 노동시장의 구조 에서 서로 다른 노동환경 아래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이 똑같은 ‘선물’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나아가 ‘일-생활 균형’이라는 이상을 빚는 문법은 무엇이며, 그 문법이 왜곡하는 것은 무엇인지, 장시간 노동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선 우리가 중심에 두어야 할 일과 시간, 삶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자투리 시간’에 갇힌 ‘깍뚜기 노동자’가 되는 여성들
조만간 기계가 대체할, ‘아무나’ 하는 고작 ‘이런 일’의 의미
마트 일자리는 대체로 중산층 가정에 속해 있어 단독 생계부양자가 아니고, 자녀가 성인기에 접어들어 돌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중년 여성의 일자리다. 이 여성들은 결혼,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후 별다른 직업적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전문직 일자리는 생각조차 못하고, 결혼 이후 지속해 온 ‘살림’도 자의 반 타의 반 지속할 수밖에 없다. 집에서 TV나 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투리 시간’에 가까운 데서 최저임금 수준이라도 괜찮으니 ‘반찬값’이라도 벌고 싶다. 돈을 많이 벌려면 ‘공단’에 가야 한다는데 공단이 다른 저숙련 일자리보다 급여가 높은 이유는 장시간 노동 때문이다. 시간급으로 따지면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이 여성들은 ‘주부 사원’으로서 노동시간이 비교적 짧고 유동적인 마트 일자리를 ‘선택’한다. 마트는 대부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노동자인 소비자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유동적인 근무 스케줄을 감당할 수 있는 노동자를 선호한다. 거기다 마트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정리하며 고객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마트 노동자의 자질은 ‘엄마의 자질’과 닮아 있다. 그러니 마트 일자리와 중년 여성의 관계는 ‘상부상조’인 걸까? 계산대를 중년 여성의 자리로 만든 이 인식은 온당한 것일까?
저자는 캐셔 노동과 같은 시간 유동성이 높은 일이 중년 여성의 일이 된 이유 중 하나로 중년 여성의 시간에 대한 상상력 부재를 꼽는다. 여성의 시간, 특히나 남편과 아이를 둔 중년 여성의 시간은 가정 밖에서 상상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자녀 돌봄에서 자유로워진 중년 여성들은 이제 특별히 할 줄 아는 일도, 할 일도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니 언제든 출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집에서 하던 대로 ‘여성적 자질’을 발휘해 ‘엄마 노릇’이나 하면 될 일이다. 출근하지 않는 날 무얼 하느냐는 질문에 중년 여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쉰다”고 답하며 스스로도 그 시간을 비어 있는 시간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 답에는 늘 가사 노동이 생략되어 있고 이들이 집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해내는 일들 대부분은 일터에게 그들이 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하지만 이들의 시간은 여전히 비어 있는 시간, 언제든 끌어다 쓸 수 있는 시간이고 이들의 능력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없는 ‘천성’으로 가치절하된다. 그렇기에 이들의 시간과 능력은 제대로 계산되지도 않고, 상상되지도 않는 것이다. 책에는 이런 왜곡된 인식을 만든 성별, 연령, 교육 수준을 비롯한 다양한 ‘차이’를 조명하는 풍부한 시각, 이 여성들을 겹겹이 둘러싸 ‘자투리 시간’에 갇힌 ‘깍뚜기 노동자’로 만든 편견들을 깨트릴 이야기가 가득하다.
직접 일을 해 보기 전까지 저자 역시 계산대 앞에서 바코드를 스캔하고 물건값을 받는 캐셔의 일이 복잡할 것 없는 일, 숙련도가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늘 능숙하게 일했던 저자는 끝내 스스로를 ‘엉터리 캐셔’였다고 평할 수밖에 없었다. 캐셔는 쪼개진 시간 속에서 거대한 마트 공간을 누비고, 고객의 눈, 동료 노동자의 눈이라는 감시체계를 몸에 새긴 채 매주 바뀌지만 공식적으로 교육되지 않는 업무 정보를 숙지한다. 거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고객만족센터’가 되어 친절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그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캐셔의 일은 무척 복잡도가 높고 숙련을 요하는, 무엇보다 시간에 늘 쫓기는 일이었다. 소비를 위한 공간의 일부처럼만 보이던 누군가의 일터가, 지금도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을 선명하게 담아 낸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와 의미는 어떻게 정의되었고,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 목차
들어가며. 엄마의 일과 시간을 이해하기
1부 계산대와 ‘워라밸’ 사이에 선 여자들
1장. 아줌마에게 ‘워라밸’은 필요 없다?―노동시간 단축과 지워진 목소리들
2장. 무엇이 노동시간 단축을 두렵게 하는가―문제는 ‘돈’이다?
3장. 생산성의 마법, H그룹의 노동시간 단축
2부 계산대는 어떻게 ‘아줌마’의 자리가 되었나?
1장. 주부 사원 구함―‘엄마’의 ‘값싼 노동’을 사는 대형마트
2장. 최저임금과 함께 아줌마들이 벌어 가는 것
3장. 아줌마의 일과 시간―가정 밖에서 상상되지 않는 ‘텅 빈 시간’ 너머
3부 계산대 앞에서 사라진 한 시간이 바꾼 것
1장. 당신이 몰랐던 계산대 앞의 일―시간과 싸우는 숙련노동
2장. 사라진 한 시간과 강화된 노동강도
3장. 휴식도 건강도 계획할 수 없는 조각난 시간
나가며. 아줌마와 ‘워라밸’ 다시 보기―임금보다 ‘시간의 통제권’으로
감사의 말
주
✦ 책 속에서
엄마가 다니는 회사는 공장 지대에 있다. 허허벌판에 공장뿐인 곳. (…) 통근버스로 드나들 수밖에 없는 곳. 이런 현장에서 노동시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가 두 시간 잔업을 공표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밖으로 나올 버스가 없으니까. 문재인 정부가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에 발맞추어 대기업인 H그룹은 자사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에서 주 35시간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 나는 퇴근을 하고 싶은데도 퇴근을 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잔업을 하는 엄마를 떠올렸다. 그에 비하면 H그룹의 B대형마트는 상황이 좋아 보였다. 나의 엄마는 가지지 못했으나 그녀들에게는 선사된 한 시간의 여유. 그 한 시간은 나의 엄마처럼 압축적인 시간을 살고 있을 그녀들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_「들어가며. 엄마의 일과 시간을 이해하기」, 11~12쪽
여성 집중 사업장 중에서도 중년여성 집중 사업장은 가장 폭력적인 환경에 놓여 있다.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며 이 여성들은 노동권을 주장할 수조차 없었던, 시키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노동환경에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유순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할 만큼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래서 안전하다(고 여겨진다). 이 여성들은 돈을 벌어야만 하나 갈 곳이 마땅치 않고, 남성관리자에게 대들지도 못한다(고 여겨진다). 돈을 벌어야만 하는 여성들이지만, 생계부양자는 아니기에 높은 임금을 지급할 필요도 없다. 착취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만나 본 그녀들은 편견과 달랐다. 그녀들은 누구보다 똑똑했다. 그들은 그들을 향한 세상의 시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내고 있을 뿐이었다.
_「들어가며. 엄마의 일과 시간을 이해하기」, 13~14쪽
노동자들은 대형마트가 얼마나 큰 줄 아냐며 휴게실까지 걷다 보면 휴게는커녕 교대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했다. (…) 소비자로서 마트를 거닐 때의 나는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공간을 탐색했지만, 노동자가 되어 20분이라는 제한 시간에 쫓기자 느껴지는 공간의 크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 거스름돈으로 줄 지폐가 부족한 날이면 화장실에 갈 틈이 없었다. 나는 늘 종종걸음을 치며 시계를 확인했다. 생애 처음으로 ‘1분’이 소중했다. 직접 일을 해 보니 무엇보다도 내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시간’이었다. (…) 매니저는 스케줄을 미리 알려 주는 법이 없었다. 스케줄은 한 번에 2~3일치가 나왔고, 그마저도 근무 하루 전날에 공지되기 일쑤였다.
_「아줌마에게 ‘워라밸’은 필요 없다—노동시간 단축과 지워진 목소리들」, 37~39쪽
문제는 ‘엄마의 자질’ 역시 여성이 노력을 통해 발전시키는 자질임에도, 여성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자질로 이해되면서 노동시장이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술과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지는 남성의 노동은 그런 자질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노력 혹은 능력이 필요하기에 중요한 일로, 보상되어야 하는 일로 간주된다. 하지만 돌봄의 자질, ‘엄마의 자질’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져 능력도 아니고, 별다른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자질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중요하지 않고, 높은 수준의 보상이 필요 없는 일로 간주된다.
_「주부 사원 구함―‘엄마’의 ‘값싼 노동’을 사는 대형마트」, 97~98쪽
지금까지 중년여성의 노동은 임금, 노동강도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같이 생산성과 연관이 깊은 지표들에만 집중한 탓에 수량화되지 않는 지표들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B대형마트 노동자들이 일을 지속하는 이유에는 임금 외에도 모임 등을 통해 동료들과 형성한 사회적 자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이 여성들은 동료들과의 모임을 통해 노동 현장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고, 노동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또 거주지를 기반으로 한 사적인 연결을 통해 유대감을 강화함과 동시에 ‘재미’와 같은 무형적 가치를 나눈다. 이런 유대감을 기반으로 노동 현장의 문제뿐 아니라 개인적인 어려움을 해소하기도 한다. 이렇게 강화된 유대감은 다시 일터에서의 연대로 이어진다.
_「최저임금과 함께 아줌마들이 벌어 가는 것」, 134~138쪽
중년여성인 전일제 캐셔 노동자들은 셀프 계산대에 배치되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 십상이다. 노동자들은 인터뷰에서 무인 계산대 경험을 스트레스받고 성질이 나는데도, 화를 낼 수 없어 사람이 망가지는 경험으로 언어화했다. (…) 게다가 셀프 계산대로 인해 같은 시간대에 열리는 유인 계산대 수도 줄어들어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있다. 유인 계산대에서 일해야 할 캐셔 노동자가 셀프 계산대로 배치되면서 유인 계산대 업무에 부하가 생겨 “포스(계산대)가 몇 개 안 열리니까 안에 매장에 들어가 보면 손님은 별로 없는 거 같은데 우리만 계속 하고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_「사라진 한 시간과 강화된 노동강도」, 227쪽
지금은 다 10분 단위로 돌아가니까 대기실에 혼자 앉아서 쉴 때도 있고, 밥도 혼자 앉아서 먹고. 출근도 혼자하고 퇴근도 혼자하고. 일도 혼자하고. 이거는 원래 계산대 일은 혼자 하는 일이니까.
_「사라진 한 시간과 강화된 노동강도」, 240쪽
서비스업은 노동자들의 시간을 쪼개어 부족한 시간에 메우는 ‘테트리스’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관리한다. 회사의 편의에 맞추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의 시간을 배치하는 것이다. (…) 노동력이 부족할수록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세분화되어 쪼개지고 무작위로 배치된다. (…) 이러한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은 더 불안정한 고용조건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전이된다.
_「휴식도 건강도 계획할 수 없는 조각난 시간」, 245~250쪽
이렇게 “쪽대본” 방식으로 근무 스케줄이 운영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기혼여성을 둘러싼 시간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중년여성은 기혼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빗겨나 있는 존재인데, 이미 자녀들이 성인기에 접어들어 생활의 중심인 자녀가 그녀들의 삶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여성들의 생활은 무(無)로 상상된다. B대형마트 근무 스케줄은 중년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상상력의 부재라는 인식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회사는 인력 부족에서 비롯된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을 조정하지 않고 이를 유지한다. 중년여성은 그렇게 해도 괜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 사실상 B대형마트의 근무 스케줄은 노동자들의 생활시간을 볼모로 잡아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_「휴식도 건강도 계획할 수 없는 조각난 시간」, 251~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