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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강 표지


소로우의 강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 (1849년)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에세이 > 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 윤규상 옮김
524쪽 | 16,000원
ISBN: 978-89-90809-46-9
2012년 11월 12일 출간


[서점 링크] 교보문고 | 예스24 | 알라딘



✦ 책 소개

소로우가 가장 많은 공을 들였던 첫 작품이자 가장 사랑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던 책!
소로우 정신세계의 바탕인 초월주의에 가장 충실했으며,『월든』과 더불어 소로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작.

이 책은 소로우의 첫 작품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의 국내 최초의 완역본으로 역자가 1년 반 이상 동안 공을 들여 번역했으며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하고도 친절한 역주가 더해져 만들어졌다. 젊은 시절 소로우의 정신세계에 방향을 잡아준 그의 사상적 토양인 초월주의에 가장 충실한 책으로, 표면적으로는 1839년에 있었던 소로우 형제의 여행기지만, 사실은 주로 초월주의 잡지인 《다이얼》에서 저자가 다시 뽑은 자신의 에세이와 시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다룬 일종의 철학적 단상이다. 소로우는 이 책 곳곳에 시를 삽입함으로써 이야기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자주 규칙적으로 서정적 감정이 분출되어 나온다. 그 고조된 감정은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인용하거나 서정성을 띠는 산문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장식적인 효과보다는, 지금 보고 듣는 것에서 더 높은 의미와 초월적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소로우의 대담하고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며, 강길따라 펼쳐진 그의 방대한 사유의 흔적은 『월든』과 더불어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작이다. 소로우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여동생 소피아에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의 책 읽는 소리를 듣다가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하고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다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 지은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183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모범생이었지만 학점에는 무관심했으며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 시절에 만난 시인이자 초월주의 사상가인 에머슨의 제안에 따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 사색의 결과물은 그의 작품의 자료가 되고 시대를 뛰어넘는 삶의 지혜가 되었다.
1845년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지은 소로는 자연 속에서 최소한의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자족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또한 그곳에서 밭을 일구고 자유롭게 여가를 즐겼으며 동식물을 관찰하고 독서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월든』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다 수감되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시민 불복종』은 국가권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 책이다. 그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세계의 역사를 바꾼 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20세기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및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존 브라운을 위해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헌신하며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치다 1862년 콩코드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 옮긴이

윤규상

옮긴 책으로 『소로의 일기: 소로의 세계를 여행하는 법』, 『소로의 일기: 자연의 기쁨을 삶에 들이는 법』, 『소로우의 강』,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등 30여 권이 있다.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현재 소로의 서적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 애쓰고 있다.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소로우의 첫 작품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의 국내 최초의 완역본이다. 소로우는 형과 함께 1839년 8월 마지막 날, 자신들이 봄철에 손수 만든 보트 ‘머스케타퀴드’호에 텐트, 엽총, 낚시 도구 등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싣고 고요한 콩코드 강을 따라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강폭이 좀 더 크고 물살이 빠른 메리맥 강과의 합류점인 로웰에까지 다다른다. 거기에서 두 사람은 “화이트 산맥에서 바다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은빛 폭포”처럼 보이는 메리맥 강을 노 저어 거슬러 올라가, 자신들의 고향마을과 이름이 같은 뉴햄프셔의 주도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까지 당도한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보트를 놔두고 좁은 시내의 둑을 따라 화이트 산맥에서 기원하는 메리맥 강의 수원까지 걸어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은 이처럼 소로우 형제의 여행기지만, 저자의 에세이와 시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다룬 일종의 철학적 단상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소로우의 정신세계에 방향을 잡아준 초월주의에 가장 충실한 책으로, 소로우의 대담하고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며,『월든』과 더불어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작이다.

소로우에게는 실제 달력상의 시간보다는 계절의 순환과 같은 상징적 시간이 더 중요했기에 토요일에 떠나 금요일에 돌아오는 이 책의 이야기도 인생과 자연의 어떤 순환으로 읽어야 한다.

「바닥에 풀이 자라는 평화와 화합의 물길, 콩코드 강」에서는 콩코드 강의 풍성하고도 평온한 풍경을 묘사하는데, 콩코드 강의 부드러운 물결과 이곳 주민들의 온건한 성격을 연관 짓기도 한다.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던 이곳은 민초들의 억척스러운 삶과 미국의 역사가 섞여 유유히 흘러왔다.

「물고기들의 미덕을 사색하다, 토요일」에서는 드디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데, 1839년 8월 31일 형 존 소로우와 함께 강길을 떠난다. 소로우는 독립혁명의 격전지를 지나 흘러가면서 강물에서 물고기를 낚는 어부와 물고기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한다. 물고기들은 우주에 가득한 온갖 생명의 형태와 단계들을 보여주며, 또 물고기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면 자연이 얼마나 안전하고 평온한지를 깨닫는다고 한다.

「시간의 퇴적 속에 묻혀버린 인디언들 삶의 흔적, 일요일」은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조용한 아침에서 시작한다. 소로우는 인디언들이 살았던 흔적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숲 생활을 하며 토박이 신들과 조심스럽게 영혼의 교류를 해온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존재로 묘사한다. 특히 이 장에서는 형해화된 기독교의 독단과 아집을 비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신약성서를 기리지만 그걸 제대로 읽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강한 비판을 한다.

「정오의 철학을 즐기는 시간, 월요일」에서는 인디언들과 격전이 있던 던스터블을 거쳐가면서 아울러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소로우는 동양의 경전 특히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를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경전 중 하나라고 높게 평가한다. 아울러 서구 세계는 아직까지도 동양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모든 빛을 끌어오지 못했다는 말을 전한다.

「뱃길 따라 정착민의 삶과 애환을 엿본다, 화요일」에서는 교역이 활발했던 강의 풍경을 이야기하고, 정착민들이 살았던 흔적을 더듬어 그들이 가졌던 꿈과 갈망들을 그려낸다. 소로우는 고전연구를 통해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다며 아나크레온의 주옥같은 시들을 펼쳐내고 있다. 저녁 무렵 간신히 인적 드문 곳에 잠자리를 마련함으로써 화요일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우정은 인생을 깊게 감싸주는 신비요 비밀이다, 수요일」에서 우정에 대한 깊은 사색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벗은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고, 우정은 서로 끌리는 사이에 생겨나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와 같다. 소로우는 우정이 갖는 기쁨 못지않게 그것이 안겨주는 애통함도 같이 이야기하면서 우정이란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가를 깊게 통찰하고 있다.

「배에서 내려 땅을 거닐다, 목요일」에서 자신들의 고향마을과 이름이 같은 뉴햄프셔의 주도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까지 당도한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보트를 놔두고 좁은 시내의 둑을 따라 화이트 산맥에서 기원하는 메리맥 강의 수원까지 걸어서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에 잠들어 가을에 깨어나다, 금요일」에서는 이제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알린다. 이는 늦여름에 시작된 여행이 가을에 끝나감을 뜻하기도 하는데, 가축품평회를 준비하는 가운데 들리는 거리의 집짐승 울음소리는 한 해가 저물어감을 절감하게 한다. 소로우는 이 장에서 오시안과 초서의 웅장하게 펼쳐지는 시를 찬양한다. 위대한 시인들의 대작처럼 콩코드 강의 자연은 ‘가을’이라는 자신의 시를 쓴다고 한다. 강길 따라 흘러온 일주일간의 여정은 가을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저물어간다.


1839년에 형 존과 함께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으로 떠난 여행에 대한 보고서가 10년 후에 적지 않은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것은 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소로우에게 형은 ‘진정한 천재’이자 ‘유쾌한 영혼’이었다. 두 사람은 늘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콩코드의 언덕과 삼림지대 전역을 함께 거닐었다. 헨리의 박물학 지식도 많은 부분이 형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이 책은 형에 대한 만가의 성격도 지니고 있으나, 이 책에 형의 이름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책은 소로우 형제의 여행기 형식을 띠는데 사실은 주로 《다이얼》에서 저자가 다시 뽑은 자신의 에세이와 시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다룬 일종의 철학적 단상이다(예를 들어 소로우는 1843년 가을 스테튼 섬에서 오시안과 초서를 연구하고, 1844년 1월 호머, 오시안, 초서, 핀다로스에 대한 에세이를 초월주의 기관지인 《다이얼》에 기고한다.)

이 책 곳곳에 등장하는 그의 명문구들은 어떤 고통이나 기쁨과는 무관하게 쉽게 떨어지는 ‘오랜 경험 끝에 무르익은 마른 과일’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예민한 감각과 실용적이고 예리한 통찰력을 통해 획득할 수 있었다. 소로우는 이상을 추구하는 집요한 이상주의자이면서도 보기 드문 진정한 해학성을 지니고 있었다.

소로우는 이 책 곳곳에 시를 삽입함으로써 이야기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자주 규칙적으로 서정적 감정이 분출되어 나온다. 그 고조된 감정은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인용하거나 서정성을 띠는 산문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장식적인 효과보다는, 지금 보고 듣는 것에서 더 높은 의미와 초월적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철학적 메시지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상상의 사람들과 역사적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면서 사실과 허구, 실제와 환상 사이에서 실제의 인물들을 상상 속의 인물처럼 보이게 한다. 여행기의 형식을 지님으로써 실제의 인물들을 다소 비현실적이면서 시적인 인물들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소로우에게 실재 인물은 사회적 외적 페르소나 뒤에 감춰져 있는 초월적인 영혼이었다.

1849년 소로우는 자신의 첫 작품이자 많은 애정을 쏟았던 이 책을 보스턴의 한 출판사를 통해 자비로 출간했지만, 처음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열정적인 이상주의와 범신론적 어조가 일반 미국인들의 마음을 끌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록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이 책은 소로우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책이며 더 나아가 문학사의 웅대한 고전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소로우의 사상적 토양인
초월주의의 정수를 읽는다


소로우는 1834년 하버드를 졸업하고 교사직을 찾을 무렵에 콩코드에서 사는 에머슨과 만나 깊은 영향을 받고 초월주의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830년대 중반에서 1840년대 중반까지 뉴잉글랜드의 보스턴과 콩코드를 중심으로 번창한 초월주의는 실제로 젊은 시절 소로우의 정신세계에 방향을 잡아준 사상이기도 했다. 이 책은 소로우가 남긴 어떤 저술보다도 초월주의에 가장 충실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초월주의는 유니테리언파 내부의 동요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니테리언파는 청교도 교회인 회중교회파의 자유주의 진영으로, 1815년에 공식적으로 그 모체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유니테리언파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타락해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은 본래부터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주류 회중교회파의 캘빈주의적 전통을 거부했다. 영성의 본질은 신학이나 신조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한 인격의 형성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리 그 자체의 권위를 의문시했다.

하지만 종교적 운동으로서의 초월주의의 이런 면모는 1830년대 말에서 1840년대 초반까지 잠시 분출했다가 이내 사그라졌고, 이후 장기적으로는 문학과 예술, 사회개혁, 인간 자아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개념을 자극하는 운동으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에머슨과 소로우에게는 초월주의가 인간 자아의 높은 가능성을 확신하는 새로운 비전이었다. 그들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미국 헌법보다 ‘더 높은 법칙’이 있다고 역설했다.

초월주의는 이상주의 철학의 새로운 분출이자 종교, 도덕, 예술, 정치에서의 문예부흥으로, 이것은 영적 물음과 자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초월주의 운동은 과거의 형식과 신조에 눌려 분출되지 못하던 청교도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새로운 탈출구와 비상구를 찾아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영국과 독일의 낭만주의,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공맹사상의 이상주의적이고 초세속적인 측면에 힘입은 바가 컸다.

개인의 정신과 영혼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고, 객관적 사실을 개인적 진리에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자립을 경제적 미덕으로 볼 뿐 아니라 존재의 온전한 철학적, 정신적 기초로 여겼다. 특히 소로우에게는 이 자립이 자신의 개인적 비전에 모순되는 모든 사회 규범, 전통, 가치를 거부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지만 소로우는 에머슨을 비롯한 다른 초월주의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명료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행동에서뿐 아니라 그의 신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실용주의’다. 그는 늘 이상을 추구하였지만,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만 천착하지는 않았으며, 견고한 사실성을 추론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의 인격과 철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에 직면하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측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과거와 현재의 사실들에 근거한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초월적 감각을 상식에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것이 그의 신조가 지닌 독특한 특징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현실적 측면과 초월적 측면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기보다는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하고, 때로는 혼재하기도 하는 양상을 지닌다.



강길따라 펼쳐진 그의 방대한 사유의 흔적은
『월든』 못지않게 소로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로우는 “자연을 제대로 보려면 인간적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자연 경관은 인간적 애정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자연은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살아 있는 실체이지, 차갑고 냉정한 관찰의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자연과 자연사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언제나 관조적이고 도덕적인 분위기가 주조를 이룬다. 소로우는 관찰로부터 얻은 단순한 사실들을 인간의 삶을 밝혀줄지 모르는 상징적인 사상과 이미지로 변화시키고자 했으므로, 소로우의 연구 대상은 엄밀히 말해 자연사가 아니라 초자연의 역사였다. 따라서 강에서 보는 물고기를 통해서도 우주를 관찰하고, 자연의 변화를 한 편의 시로 묘사한다.

소로우는 이 책에서 『바가바드기타』를 비롯한 여러 동양 종교의 오래된 경전들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아직도 서구는 ‘동방의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또 예수회 선교사들과 초기 뉴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들,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출처에서 뽑아낸 토착 인디언 부족들의 기록들을 풍성하게 인용하고 있다. 인디언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그에게 기이한 관심과 매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인디언들의 숲에 대한 본능적 지식과 변함없는 애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또한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과 백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비감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쇠락해가는 소수 인종의 정신에 대해 두드러진 공감과 동정을 보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소로우의 야생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소로우는 뉴잉글랜드에서 야생생활의 인간 대표자라 할 인디언들에게 깊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강은 소로우가 사철 내내 즐겨 찾는 산책로였다. 여름에는 강가에 있는 채닝의 정원에 정박해둔 보트를 타고 거의 매일 여행을 했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물이 편리한 통행로를 마련해주었다. 강은 소로우의 중요한 삶의 공간이자 사색의 공간으로 그에게 깊은 영감을 제공해주는 장이다. 이 책에서 소로우가 말하고자 했던 많은 것들 즉 형과의 추억, 질박한 민초들과 인디언들의 삶, 자연의 변화, 위대한 시인 등은 강을 통해 깊게 응축되면서 또한 강처럼 유유하게 펼쳐져 간다.

소로우는 비록 그 당시 독자들에게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었지만 자신이 그토록 많은 공을 들였던 이 첫 작품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여동생 소피아에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이 책 읽는 소리를 듣다가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하고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다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 목차

바닥에 풀이 자라는 평화와 화합의 강, 콩코드 강
물고기들의 미덕을 사색하다, 토요일
시간의 퇴적 속에 묻혀버린 인디언들 삶의 흔적, 일요일
정오의 철학을 즐기는 시간, 월요일
뱃길 따라 정착민의 삶과 애환을 엿본다, 화요일
우정은 인생을 깊게 감싸주는 신비요 비밀이다, 수요일
배에서 내려 땅을 거닐다, 목요일
여름에 잠들어 가을에 깨어나다, 금요일


옮긴이의 말: 소로우의 사상적 토양인 초월주의의 정수를 읽는다



✦ 책 속에서

나는 콩코드 강둑 위에 서서 모든 진보의 상징인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며, 우주와 시간과 모든 피조물이 따르는 같은 법칙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강바닥의 물풀들은 물결의 바람에 흔들리며 부드럽게 하류로 몸을 굽힌 채 아직도 씨앗이 가라앉은 곳에서 자라지만, 머지않아 그들도 죽어 물결처럼 떠내려 갈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바람도 없이 그저 빛나는 조약돌들, 나뭇조각들과 잡풀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성실히 이행하며 떠내려오는 통나무들과 나무줄기들은 나에게 아주 묘한 흥미를 일으켰다. 드디어 나는 이 강이 나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그 물결의 가슴팍 위에 띄워 보낼 결심을 했다.

-20쪽


마지막으로 나는 물고기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웨일랜드, 서드베리, 콩코드 마을사람들을 위해서도 댐이 헐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넓은 초원이 마른 땅이 되기를, 다시 말해 들풀이 영국 종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기다린다. 농부들은 물이 빠져서든, 증발해서든 물이 물러나길 기다리며 벼린 낫을 들고 서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눈 둘 곳마저 찾지 못할 지경이다. 게다가 마른풀 만드는 계절 내내 마차바퀴도 구르지 못할 정도로 들판이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엄청난 부가 있는 그곳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 이로 인해 웨일랜드 마을이 1년에 입게 되는 손실만 따져도 백 쌍의 황소를 키우는 비용에 맞먹는다고 한다.

-51쪽


우리는 인디언을 개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디언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숲 생활을 하면서 토박이 신들과 조심스럽게 영혼의 교류를 해왔고, 자연과 드물면서 각별한 사귐을 갖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의 살롱에서는 보기 드문,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지녔다. 눈부시지만 헛되이 스러지고 마는 촛불과는 달리 별처럼 빛나건만, 멀리 떨어진 탓에 희미하게 보일 따름이다.

-75쪽

나는 어떤 이들은 종교 울타리 밖에 있더라도 부처나 그리스도나 스베덴보리에 바짝 다가갈 수 있고, 그분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 믿는다. 그리스도의 아름답고 의미 깊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 꼭 기독교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들은 내가 나의 부처와 나란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 걸 듣고 언짢게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의 부처보다 자신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는 데 대해 전적으로 찬성한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나 또한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하느님은 글자 Khu일 뿐 아니라 Ku이기도 하다.” 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너그럽지 못하고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가? 마음이 소박한 선원들은 요나 자신이 요구하는데도, 요나를 배 밖으로 내던져버리길 원치 않았다.

-88~89쪽

우리는 책을 골라 읽을 필요가 있으니, 책은 평생 사귀어야 하는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진실한 책만 읽어라. 통계, 소설, 뉴스, 보고서, 정기간행물 따위는 읽지 말고, 위대한 시만 읽어라. 그것들이 동이 났을 때는 되풀이해서 읽거나, 아니면 스스로 더 많이 쓰려고 해보라. 우리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보다는 자신의 온전한 생각을 시나 찬송으로 바쳐야 한다.

-122쪽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하기만 한 글은 무척 보기 드문 게 사실이다. 사람들은 글에 담겨진 생각에서 나오는 빛깔과 향기를 놓쳐버리기 일쑤이다. 빛깔이야 어떻든 아침이슬과 저녁이슬을 보면 기쁨을 느끼고, 색깔이야 어떻든 하늘을 보면 기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가장 매력적인 글은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이 아니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다. 말하는 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는 듯, 탁 터놓고 잘라 말하기에, 슬기로운 글은 못 된다 해도 적어도 확실히 터득된 글이기는 하다.

-132쪽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134쪽

어떤 시간은 일을 하기에는 도무지 알맞지 않고, 숨을 들이쉴 작정이나 하기에 알맞은 것 같다. 그럴 때는 피가 끓어 당장 달려들려고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니라, 반쯤은 벌써 이루어졌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나 문을 닫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서 이리저리 거닐어야 한다. 씨앗이 자체에 들어 있는 배젖으로 싹을 틔워 땅 밑으로 내려 보내고 나서야 햇빛을 향해 자라나듯, 우리의 결심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해진다.

-136쪽


책은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보다는 얼마나 거룩한 주제를 다루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동양철학은 현대 서구철학이 다루는 주제들보다 훨씬 높고 중요한 주제들에 손쉽게 다가가므로, 이따금 동양철학이 이런 주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줄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동양철학만이 행동과 사색 양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니, 동양철학만이 사색을 올바로 본다. 서구철학자들은 사색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184쪽


강은 단연 가장 매력적인 고속도로로, 이 위에서 20년이나 25년쯤 보낸 저 뱃사공들은 같은 기간 동안 강물과 나란히 놓인 도로를 달려온 저 먼지투성이의 거친 말몰이꾼들보다는 훨씬 더 아름답고, 즐겁고, 잊기 어려운 기억을 갖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메리맥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거의 어떤 마을도 보지 못하고, 다만 숲과 방목지가 연달아 교차하는 가운데 가끔씩 사과나무 몇 그루가 드문드문 서 있는 옥수수밭이나 감자밭, 귀리밭이나 호밀밭, 영국 종의 풀밭을 보고, 더 뜸하게 나타나는 농부의 집을 본다. 이 지역은 드넓은 골짝에 있는 좋은 땅을 빼면, 토질이 우국지사들이나 원했을 법한 푸석푸석하고, 모래가 많은 땅이 대부분이다.

-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