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황홀한 역사
Heaven and Hell (2020년)
: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역사 > 세계사, 종교사
바트 어만 지음 | 허형은 옮김
21,000원 | 464쪽
ISBN: 979-11-87038-65-8
2020년 11월 27일 출간
✦ 책 소개
『길가메시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까지 새롭게 톺아보는
산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두렵고도 황홀한 사후 세계의 역사!
영민한 논리와 도발적인 관점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도 대부분이 믿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관이 성서에 기반한 개념이 아님을 논증한다. 저자는 심지어 예수조차 그런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고, 지금 믿어지는 것처럼 단일한 사후 세계관이 기독교 내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서로 경합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사회, 문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채택되어 왔음을 밝힌다. 성서와 외경뿐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이르는 풍부하고 면밀한 문헌 검토와 날카로운 분석, 위트 있는 문체를 두루 갖춘 이 책에서 저자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익숙한 생각들을 다시 성찰하도록 돕는다.
✦ 추천의 글
코로나19 이후 죽을 운명, 그리고 이 생을 마친 뒤 기다릴 것들은 많은 이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주제다. 이 책은 지금, 예기치 않게 선견지명을 갖춘 책으로 찾아왔다.
_《스미소니언 매거진》
늘 어만을 흠모했다. 과거에 신앙을 가졌던 그는 그 어떤 신학자나 신앙인 못지않게 성경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어만의 책들과 사랑에 빠졌다. 내게 어만의 책은 기독교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_마이클 셔머, 《스켑틱》 편집장, 『천국의 발명』 저자
✦ 지은이
바트 어만 (Bart D. Ehrman)
오늘날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성서학자 중 하나로 그리스도교의 역사·문헌·전통에 대한 뛰어난 해설가다. 어만의 저작은 옹호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성경 왜곡의 역사』, 『예수 왜곡의 역사』,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를 비롯해 3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CNN, NBC 및 역사채널(History Channel) 같은 텔레비전과 미 공영라디오(NPR) 프로그램에 출연해 복잡한 성서의 세계를 대중에게 명쾌하고 수월하게 풀어 주는 역할을 해 왔다. 또 《타임》, 《뉴욕타임스》, 《뉴요커》, 《워싱턴포스트》 등 매체에도 지속적으로 기고해 왔다. 누리집 http://www.bartdehrman.com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옮긴이
허형은
숙명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미친 사랑의 서』, 『모르타라 납치사건』, 『토베 얀손, 일과 사랑』, 『삶의 끝에서』,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생추어리 농장』, 『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우리가 죽은 뒤,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
‘죽음’은 정말로 삶에서 실현되지 않던 정의를 위한 ‘심판’이 될까?
‘천국과 지옥’의 기원, 그리고 삶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가장 지적인 여정!
주변을 둘러보라. 단 하나의 불행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지금 당신이 사는 곳이 이 세계는 아님이 분명하다. 과거에도 지금도 이 세상에는 고통과 불의가 끊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량한 이들에게 이유 모를 고난이 닥치고, 약삭빠르고 악랄한 이들은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의가 실현될 순간이 오리라는 기대를 멈추지 않았다. 그 기대는 인류 역사의 어느 한순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정의가 이루어질 순간으로 ‘죽음’을 호명했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죽음이라는 심판의 때를 기점으로 우리 각각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마땅한 결과를 맞게 되리라는 대안을 떠올린 것이다. 완전치는 않지만 대체로 만족스럽고, 여전히 매혹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이 생각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신뢰하는 이들은 기독교도일 테고,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대부분 이 생각이 성경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면 믿어지는가? 예수의 가르침 어디에도 천국이란 상과 지옥이란 벌이 없다면 어떤가?
영민한 논리와 도발적인 관점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도 대부분이 믿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관이 성서에 기반한 개념이 아님을 논증한다. 저자는 심지어 예수조차 그런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고, 지금 믿어지는 것처럼 단일한 사후 세계관이 기독교 내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서로 경합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사회, 문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채택되어 왔음을 밝힌다. 성경과 외경뿐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과 문헌을 경유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이르는 풍부한 문헌 검토와 날카로운 분석, 위트 있는 문체를 두루 갖춘 이 책에서 저자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익숙한 생각들을 다시 성찰하도록 돕는다.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까지 새롭게 톺아보는
산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두렵고도 황홀한 사후 세계의 역사!
최초로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가 존재하게 된 때는 언제일까?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태초’부터는 아니었다. 물론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개념이기는 하다. 정확하게 ‘천국(heaven)’이나 ‘지옥(hell)’으로 이름 붙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난 이들이 갈 곳으로 행복한 천상의 엘리시온과 고통과 허무뿐인 지하 세계 하데스를 구체화한 것은 기원전 7세기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였다. 그리고 호메로스 서사시 속 주인공들이 보았던 절망과 희망의 두 장소는 수 세기가 지난 뒤, 기원전 1세기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보다 명확하게 지난 생에 대한 응보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천국과 지옥 개념에 다가간다.
이 두 서사시인 사이에서 주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던 이는 흥미롭게도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라며 죽은 뒤에 이루어지는 심판의 장소를 언급한다. 부정한 삶을 살았던 혼들은 거기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방황하게 되지만 고결한 혼들은 ‘신들 곁에서’ 좋은 시간을 보낸다. 또한 특별히 경건하고 고결한 삶을 살았던, 특히나 ‘철학으로 자신을 충분히 정화한 이들’은 더욱 더 좋은 보상을 받게 되리라고 했다. 물론 플라톤은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자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 믿지는 않으리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뜻만은 진실하다고 덧붙인다. 당연히 그 뜻은 살아가는 동안 악보다는 선을 택하고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적 가르침 속에서 개개인이 죽고 난 뒤 받을 심판과 그 응보로서의 천국과 지옥이 자리 잡는 것은 훨씬 복잡한 논의를 거친, 더 이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 인물이자 기독교의 스승으로서 예수가 남긴 가르침으로 볼 만한 「마태복음」 25장의 뜻은 플라톤을 비롯한 기독교 바깥의 이야기꾼과 사상가 들과 궤를 같이한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영광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던 자에게 돌아간다. 가장 어렵고 소외된 이를 외면하지 않고 돕는 것, 그로써 살아가는 동안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 두렵고도 황홀한 약속으로 예수가 이끌고자 한 바였다.
죽음의 예습이 마땅히 “사는” 법이라면, 죽음은 더더욱 두려워할 게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뒤집을 합리적이고 건강한 회의론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바가 실제로 참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이 문제를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지나간다. 우리가 품은 신념과 개념은 그와 다른 가치관을 교육받으며 자란 이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심오한 차원에서 이해”가 된다. 그것이 가장 극명한 영역이 바로 종교의 세계다. 자신이 뼛속까지 받아들인 믿음의 참됨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_본문에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벌’을 받지?” 괴로움 앞에 쉽게 떠올릴 만한 이 질문에는 고통받는 자를 성마르게 죄인으로 치환하는 논리가 숨어 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 다수는 이미 알고 있다. 삶에는 합리적 사고로 해독할 수 없는 일들로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강력한 믿음, 상과 벌로 찾아올 신의 정의라는 믿음에 대해 저자는 묻는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영원히 고문하는, 웬 초월적인 사디스트라고 믿으란 말인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되었다가, 학문으로서의 기독교를 깊이 탐구하고 ‘거듭 죽은 자’로 돌아온 저자는 믿음 있는 자들이 약속받는 정의를 거듭 회의하도록 촉구한다.
긴 여정의 끝에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모든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은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란 사실이다. 삶의 끝에 공평하게 맞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정의로운 심판이라서가 아니다. 플라톤은 모든 생의 목표이자 가장 마땅한 삶의 방식을 ‘죽음에 대한 예습’이라고 봤다. 인간의 육신은 언젠가 죽어 없어질 테고, 그렇기에 철학자와 제대로 사고할 줄 아는 모든 사람은 사는 동안 찰나인 육신의 쾌락이 아닌 인간에게 내재한 초월적인 부분, 즉 정신과 영혼이 육체를 초월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다가올 죽음을 매일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궁극적으로 정신이 육신을 초월하게 될 죽음은 준비된 이에게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운명을 가진 이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우리의 죽을 운명을 톺아 가며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필멸의 운명을 용감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그래도 된다는 응원이다.
✦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천국과 지옥으로의 여정
2장 두려운 죽음
3장 사후 세계 이전의 사후 세계
4장 정의의 실현: 사후 상벌 개념의 부상
5장 히브리 성경과 죽음 후의 죽음
6장 되살아난 시체들: 고대 이스라엘의 부활 개념
7장 왜 부활을 기다리는가: 죽음 직후의 사후 세계
8장 예수와 사후 세계
9장 예수 사후의 사후 세계관: 사도 바울
10장 수정된 예수의 사후 세계관: 후대의 복음서들
11장 요한계시록과 사후 세계의 신비
12장 육신으로 사는 영생
13장 기독교 사후 세계의 황홀경과 고문
14장 연옥, 윤회,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구원
나가는 말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찾아보기
✦ 책 속에서
죽음을 앞두고 삶을 어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닥칠 일을 두려워해 움츠릴 필요는 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저 죽음을 피하려고 빤히 잘못됐음을 아는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결과가 어찌되건 옳을 일을 하는 편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좋기까지 한 일을 피하기 위해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보다 백번 낫다.
_「두려운 죽음」, 62쪽
플라톤은 육체적 쾌락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궁극의 적이라고 간주한다. 쾌락은 인간을 육신에 속박시킨다. (…) 쾌락을 느끼는 세속적 육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살아갈 영혼이다. 우리는 육신의 욕구와 욕망을 무시하고 영혼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사실상 강렬한 쾌락을 삼가는 것,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무관심한 것을 뜻한다. 인생의 목표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인간에게 내재한 불멸성과 신에 필적하는 부분들에 집중함으로써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영혼이 육체를 초월하도록 힘쓰는데, 그런 면에서 그들은 죽음을 예습하고 있는 셈이다.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불가역적으로 분리되므로, 철학자들(더불어 제대로 사고할 줄 아는 모든 사람)은 영혼의 안녕에 집중함으로써 육신의 족쇄를 탈피해 “날마다 죽어”야 한다. 나아가, 죽음을 예습하는 게 마땅히 “사는” 법이라면 실제 물리적 죽음은 더더욱 두려워할 게 없다. 외려 기꺼이 환영해야 한다.
_「두려운 죽음」, 64쪽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점은, 죽음 이후의 세계보다 현재의 삶에 방점이 있었다. 그의 철학적 견지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파이돈」에서 그가 내세운 견지는, 누구도 죽음 뒤에 올 것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비윤리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죽음이 악한 게 아니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건 결코 옳을 수 없음을 알고서 필멸의 죽음을 용감하게 직시해야 한다.
_「두려운 죽음」, 66쪽
오늘날 기독교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관점이기도 하며, 우리의 평상시 화법에도 깊이 스며 있어서 흔히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벌을 받지”라고 불평한다.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건 우리가 그럴 만한 짓을 저질러서 그렇다는 사고다. 물론 요즘에는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대부분이 안다. 선천적 장애라든가 어린아이의 죽음, 알츠하이머, 그 밖에 마음을 마비시킬 정도로 무거운, 수없이 많은 극한의 고난이 전부 우리가 뭔가 잘못해서 신이 내린 벌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싶은가?
_「되살아난 시체들」, 164쪽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 사상가들은 어째서 정의가(하나님이 내리는 상과 벌도 포함해) 미래의 어느 시점에야 이루어지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의란 엄중할 뿐 아니라 신속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을 파고든 끝에 일부 유대인들은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대기 기간이 없이, 죽음 직후의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사후 세계관의 변화는 후대 사상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작용했고, 훗날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관념도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_「왜 부활을 기다리는가?」, 194쪽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다른 묘사에서, 예수는 다가오는 심판을 그물에 걸린 물고기 중 좋은 물고기만 골라내는 어부에 비유한다(「마태복음」 13장 47-50절). 어부가 원치 않는 나쁜 물고기는 어떻게 될까? 그냥 던져 버린다. 그것들을 잡아다 고문하지 않는다. 나쁜 물고기들은 그냥 죽는다. 이와 같이 최후의 심판 때 천사들도 악한 자들 사이에서 의로운 자들을 선별해 내 전자는 타는 불에 던져 버릴 거라고 예수는 말한다. 던져진 자들은 불에 타 사라질 것이다. 1세기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불로 인한 절멸”이라는 표현을 듣고서 지옥의 영원한 불이 아닌 가정집에서 피우는 불(혹은 범죄자의 화형)을 떠올렸을 것이다. 화형에 처해 죽는 사람은 죽어 가는 동안 고통에 울고 비명 지른다. 하지만 열흘이나 만 년 동안, 혹은 백억 년 동안 계속 울고 비명 지르지는 않는다. 그냥 죽는다.
_「예수와 사후 세계」, 234쪽
바울은 예수의 초기 제자들 중 예수의 가르침을 발전시키거나 변형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의 추종자 대다수가 그렇게 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예수가 기대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우주의 심판자가 강림하면서 시작될, 임박한 그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냥 예수가 틀렸던 거라고 결론짓는 대신, 예수의 말이 오인됐거나 잘못 인용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새 시대에 맞게 새 어법으로 옮겨, 그들이 당면한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은 늘 그렇게 해 왔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_「수정된 예수의 사후 세계관」, 280쪽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바가 실제로 참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이 문제를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지나간다. 우리가 품은 신념과 개념은 그와 다른 가치관을 교육받으며 자란 이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심오한 차원에서 이해”가 된다. 그것이 가장 극명한 영역이 바로 종교의 세계다. 자신이 뼛속까지 받아들인 믿음의 참됨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_「나가는 말」, 413쪽
지난 세월 이 문제로 고민한 수많은 학자의 생각을 읽고 난 지금, 나는 결국 이 문제를 가장 잘 표현한 위대한 소크라테스의 견지를 취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죽음은 둘 중 하나였다. 먼저 꿈조차 꾸지 않은 깊은 잠,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잠보다 훨씬 깊은 잠이었다. 우리 중 한잠 푹 자는 걸 두려워하는 이는 없고, 푹 잔 것을 아까워하는 이도 없다.
_「나가는 말」, 4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