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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표지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사회과학 > 사회학 일반
장석준, 김민섭 지음
16,500원 | 296쪽
ISBN : 979-11-87038-91-7
2022년 10월 25일 출간


[서점 링크] 교보문고 | 예스24 | 알라딘



✦ 책 소개

수많은 책과 언설로 지능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능력주의 세계관’의 실상과 한계가 폭로되었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여전히 사회의 강력한 헤게모니다. 능력주의의 바깥은 가능할까? 이 책은 논픽션과 픽션의 시선을 겹쳐 능력주의 세계관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착한다.

논픽션 파트의 저자 장석준은 근대사를 거치며 대두된 ‘지식 중간계급’에 주목해 능력주의의 기원과 한국이 능력주의의 최전선이 된 기원을 추적한다. ‘노동자 정체성’으로 민주사회의 토양을 일구었던 이들은 어떻게 능력주의의 가장 큰 신봉자이자 실패와 체념, 분노로 점철된 자녀 세대를 낳았을까? 자본가와 관리자가 되는 ‘지식 중간계급’의 상위계급이 아닌, 경쟁에서 줄곧 낙오하는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계급과 노동계급의 꿈과 세계관, 계급의식은 어떻게 능력주의와 연결되어 이를 단단히 지탱하는 것일까? ‘계급’에 주목한, K-능력주의의 새롭고 의미 있는 분석이 펼쳐진다.

픽션 파트의 저자 김민섭은 지방대학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능력주의 ‘사다리 세계관’의 패자들이 모여 사다리 근방을 서성이며 겪는 곤란과 좌절, 분투를 그린다. 학교에서는 ‘교수님’이라고 불리지만 건강보험료도 내지 못해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시간강사 오름, 서울 본교로의 ‘소속변경’을 꿈꾸며 겉돌고 패자라는 좌절감을 느끼며 폭력에 순응하는 또 다른 오름들은 우리를 옥죄는 능력주의라는 좁은 틀을 낱낱이 보여 준다.



✦ 지은이

장석준

사회학을 공부했고, 진보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 왔다. 진보신당 부대표를 거쳐 현재는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주된 관심사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의 방향과 얼개다.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장석준의 적록서재』, 『사회주의』, 『신자유주의의 탄생』 등을 썼고, 『포스트 성장 시대는 이렇게 온다』(공역), 『길드 사회주의』,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공역) 등을 옮겼다.



✦ 옮긴이

김민섭

글을 쓰고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2021년 봄부터는 바다가 좋다는 아이들의 말에 강릉 초당동에 이주해 지내고 있다. 저서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새로운 세습 통로가 된 능력주의
K-능력주의의 바깥은 가능한가?


지능과 노력만 있으면 계층·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개천의 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능력주의의 위선과 실상은 이미 폭로되었다. ‘금수저’들의 세습 질서를 깨고 ‘공정’을 실현하는 수단인 듯 보였던 능력주의는 어느덧 중산층 세습화 현상을 지탱해주는 새로운 세습 통로가 된 상황이다. 이렇듯 능력주의가 본래의 의도를 한참 벗어난 지 오래지만,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너무나 쉽게 열패감으로 낙인찍힌다. “너의 불행은 네가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이며, “사다리 꼭대기와 사다리 아래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야말로 불공정”하다는 흔한 말들 속에서 능력주의 세계관의 바깥이 정말 가능할까?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능력주의는 어떻게 사회 전체의 헤게모니가 되었는가?
능력주의 담론의 미도착지, ‘계급’으로 소묘하는 능력주의 세계관의 본질


논픽션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의 저자 장석준은 능력주의 담론의 미도착지, ‘계급’에 주목해 능력주의의 현실을 파헤친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팽창한 고등교육 과정에서 기존 자본가와 노동자와 구별되는, 지적 노동을 수행하는 집단인 ‘지식 중간계급’이 탄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문직-관리자를 꿈꾸는 이들 계급은 생산 사슬이 해외로 옮겨가고 관리 조직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관리자본주의로의 경향성과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것이 그 어떤 생산 활동보다 큰 수익을 가져오는 신자유주의 흐름 아래서 급성장하며 능력주의의 핵심 담지자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저자는 능력주의로부터 직접 이익을 얻는 이들 핵심 담지자 5~10퍼센트만으로는 능력주의가 이토록 강력함 힘을 얻을 수 없었음을 지적하며 능력주의의 성공은 경쟁에서 주로 낙오하고 불평등을 세습하는 노동계급과 지식 중간계급 하위 계층의 열띤 지지로부터 비롯된다는 아이러니를 짚는다. 동시에 이들의 계급배반적 선택이 ‘평등’의 기치 아래 확대된 공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환기한다. 능력주의가 갓 부상하던 시기만 해도 전통적 장인 노동의 잔재가 남아 있는 작업을 수행하던 노동계급은 자본가와 관리자가 제시하는 ‘똑똑함’이라는 기준에 주눅 들지 않았을뿐더러 사회(민주)주의, 아나키즘과 같은 여러 좌파 이념을 발젼시키며 자신들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주역으로 인식했었으나, 공교육 시스템 속에서 모두가 ‘지능’으로 줄 세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그 과정에서 풍부한 문화자본을 지닌 계층에 속한 이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노동계급은 이제 그들만의 자부심 대신 패배감만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능력주의로부터 직접 이익을 얻는 계급보다 이들 노동계급과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이 자신을 실패자로 받아들이며 항의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능력주의 세계관에 대해 침묵과 동의, 미련만을 갖게 되었던 상황이 능력주의가 견제 세력 없는 강력한 헤게모니로 자리하게 된 핵심 기반이었음을 역설한다.

픽션 「유령들의 패자부활전」의 저자 김민섭은 지방대학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과 노동계급의 경계선 위에 선 인물들, 즉 능력주의 ‘사다리 세계관’의 패자들이 사다리 근방을 서성이며 겪는 곤란과 좌절, 분투를 그린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서울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 이들은 “인생을 서글프게 만드는 힘이 있”는 “그 터미널에 내린 순간”, 그곳이 “어디까지 더 미끄러지게 될 것인”지를 슬프게 체감하게 하는 “미끄럼틀”임을 직감하며 패배감, 좌절감, 무력감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아직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울 본교로 ‘소속변경’을 하여 졸업장에서 지방대학이라는 타이틀을 지우고자 하는 학생들과, 건강보험료도 내지 못해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시간강사이지만 교수가 되기만 하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주인공 오름의 앞에 또 다른 좁고 가파른 사다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낙오한 사다리 아래에서 또 다른 사다리를 부여잡는 이들 각자의 패자부활전은 갈수록 비좁고 가파른 사다리 끝에 영원히 매달리게 하는 능력주의의 세계관의 아득하고 좁디 좁은 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한국은 어떻게 능력주의 디스토피아의 최전선이 되었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관련된 인천국제공항 사태, 기간제 교사의 정교사 전환 이슈, 사법고시 부활론 등에서 보듯 한국인들에게는 시험을 통해 모든 사람을 특정한 능력에 따라 서열화할 수 있고 그 서열에 따라 대우와 보상이 달라지는 것이 공정하다는 인식이 특히 만연하다. 한국에서 이러한 무소불위의 능력주의가 나타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 장석준은 K-능력주의의 질주가 제동을 맞을 수 있었던 기회로 1987년을 꼽는다. 넥타이 부대와 함께 민주화의 주역으로 부상한 노동계급이 지식 중간계급과 활발히 소통하며 사회를 수직의 사다리가 아닌 수평적 무대로 바라보는 그들만의 정서, 상식, 이념을 사회 전체에 공유할 수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중간계급이 ‘부동산’과 ‘교육’ 투자라는, 87년 직후와는 전혀 다른 지향을 추구하게 되면서 거대한 사다리 세계관이 등장했고,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계급이라는 평가를 받던 한국의 노동자 조직들이 기업별 노동조합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대기업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능력주의의 확산을 견제하는 균형추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노동계급의 상당 부분까지 능력주의에 포섭되게 만드는 통로 구실을 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형편은 신자유주의를 거친 미국이나 서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경우는 한때 성장했던 노동계급 문화가 쇠퇴한 결과라면, 한국 사회는 노동계급의 문화가 채 등장하지도 못 했음을 짚으며 이것이 한국을 전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능력주의 디스토피아가 전개되는 공간으로 만든 까닭임을 세밀하게 밝힌다.



능력주의의 바깥을 향하는 길,
‘능력 일원론’에서 ‘능력 다원론’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능력주의 사회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대안으로 그간 입시 경쟁과 대학 서열 체제를 흔드는 등의 교육 개혁안들이 줄곧 논의되어 왔다. 이 책은 그 방향성에 공감하면서도 능력주의가 계급 문제인 이상, 계급적 해법을 고려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특권 확보나 세습 통로를 만들려는 집단은 끊임없이 재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저자가 더하는 새로운 해법은 노동계급식 능력 관념인 ‘능력 다원론’의 새로운 부활이다.


이 책은 줄곧 패배로 내몰리는 집단들, 즉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과 노동계급이 만나는 광범한 점이지대”에서 “소유인과 지능인”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다원적 능력 사회를 지향하는 흐름들이 나타날 때 능력주의가 비로소 위축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산업별 노동조합과, 이에 기반한 산업별 노동자 숙련 형성 및 평가 시스템 구축 등의 방안을 함께 살피며, 독자는 대기업에 고용됐는지 중소기업에 고용됐는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가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산업별 교섭을 통해 “직종과 기업 규모, 고용 형태 등이 얽힌 거대한 일자리 사다리가 완화된” 사회의 스케치에 보다 선명히 다가간다.

픽션 「유령들의 패자부활전」도 사다리 주변이 세계의 전부였던 이들이 마침내 사다리 바깥을 응시하는 선택을 그린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오르기는 어렵고, 머물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하고, 누군가의 허리를 잡고 함께 내려가기는 쉬운” “미끄럼틀”로 감각했던 주인공이 건강보험료를 내기 위해 진입한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와 대리운전 노동에서 “분교, 본교”, “지방대, 명문대”, “시간강사, 교수” 등 자신을 옥죄고 있던 기준들로부터 벗어난 삶을 경험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얼떨결에 사다리 밖으로 나와 “모두가 중간계급에 안착하기를 바라는 구조”, 즉 사다리 세계관 자체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 주인공 오름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인가”라는, 타인보다 자신을 의식하는 질문을 시작하며 ‘대학’에 두던 삶의 구심점을 ‘나’로 옮겨 간다. ‘과연 내게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곱씹게 하며, 「유령들의 패자부활전」은 읽는 이에게 각자의 능력주의 너머를 좀 더 가깝게 상상하게 한다.



✦ 목차

들어가는 글

논픽션_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제1장 능력주의는 계급 문제다
제2장 능력주의의 역사 속 능력주의의 담지자 – 지식 중간계급
제3장 한국, 최첨단 능력주의 사회
제4장 능력주의 대 다원적 능력 사회

픽션_유령들의 패자부활전

나가는 글
참고 문헌



✦ 책 속에서

나는 마코비츠가 지목한 엘리트층이 능력주의의 핵심 담지자이지만, 능력주의를 믿고 지지함으로써 이것이 사회 전체에 헤게모니를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계층은 마코비츠가 말한 최대치(전체 가계의 10퍼센트선)보다는 더 넓고 두텁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들을 일단 ‘지식 중간계급(intellectual middle class)’이라 부르겠다. 지능을 기준으로 유능함을 인정받아 온 이들이 역사적으로 ‘지식(인)’이라 불려 왔기에 이를 이름에 포함하자는 것이며, 이들이 ‘능력’을 통해 사회 피라미드의 최정상을 바라보며 계층 상승을 지향하기에 일단 ‘중간계급’이라 하자는 것이다.

_47쪽


즉, 관료제의 발전과 지식 계급의 성장이 동시에 전개되는 상황(‘능력주의 상황(meritocratic conditions)’이라 줄여 말할 수 있겠다)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동아시아의 조숙한 능력주의 사례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영원히 능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동아시아 사회들의 ‘특수한’ 운명이 아니라 오히려 능력주의가 대두하는 이러한 ‘보편적’인 조건이다.

_57쪽


공교육 확대는 평등의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 세대 노동계급이 견지하던 자생적 평등주의만 약화시켰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세월을 학교에서 보내게 된 노동자들은 노동계급으로 남은 현재 처지를 인생의 결정적 시기에 ‘시험’에서 실패한 탓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나고 자란 고용주 앞에서 당황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학교 동기일지도 모르는 관리자 앞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낭패감을 맛볼 수 있음이 확인됐다. 저들은 시험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유능한 자들이고 나는(‘우리는’이 아니다!) 실패한 무능한 존재라는 낯선 생각이 퍼져 나갔다. 이제 노동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은 자본가보다 더 인간답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인생의 시험에 실패했다는 자책감이 드는 쪽에 더 가까워졌다.

_100~101쪽


상위 중간계급은 이런 구조가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 실제로 대를 이어 성공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능력주의의 열혈 지지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 반면에 하위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은 둘 다 패배를 맛보지만, 이 패배에 반응하는 방향은 사뭇 다르다. 노동계급은 경쟁에서 일찌감치 퇴장하며 능력주의를 묵인하더라도 마지 못해 그러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하위 중간계급은 학교와 관료 조직 안의 경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며 다만 경쟁이 좀 더 ‘공정’해지길 바라거나 아니면 재도전 기회(내가 아니라 자녀를 통해서라도)를 얻길 바란다. 상위 중간계급의 직접적 이익뿐만 아니라 하위 중간계급의 이런 동의와 미련이 능력주의적 사고와 시스템을 지탱해 준다.

_110쪽


대도시 아파트 소유와 투자, 자녀의 학벌 취득을 통한 계급 지위 세습, 이것은 1987년 이전에 이미 형성되고 있던 ‘강남 중산층’ 문화의 두 축이었다. 그러고 보면 1990년대부터 지식 중간계급에 확산된 생활양식은 강남 중산층 문화의 확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신중간계급 문화가 준비되고 있었고, 이것이 사회를 경쟁 사다리로 보는 세계관을 통해 중간계급을 중간계급으로 묶어 준 것이다. 더구나 이 문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전 지구적 흐름과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졌다. 부동산시장과 자녀 교육 경쟁에 집착하는 전 세계 중간계급의 표준적 생활 양식은 한국 중간계급에게는 이미 낯익은 것이었다. 이들은 어쩌면 ‘준비된’ 대세였다.

_141쪽


기업별 노동조합도 노동조합이기는 하다. 노동법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기업별 노동조합을 노동계급 조직이라 할 수는 없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계급’으로 묶지만, 기업별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은 단지 ‘종업원’이기 때문이다. (…) 기업별 노동조합은 노동계급보다는 지식 중간계급에게 유리한 조직 형태였다. 사무직·전문직이 중심이 된 기업 단위 노동조합은 승진 사다리 아래쪽에 있는 사원들의 목소리를 내는 기구로는 제격이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에 고용된 생산직·서비스직 노동자들에게는 만들고 꾸려 가기 참으로 벅찬 조직 형태였다.

_142쪽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업별 노동조합을 통해 다른 노동자 집단보다 더 많이 확보한 임금 소득이 주로 어디에 쓰였느냐는 것이다. 그 용처는 지식 중간계급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가 소유주가 되고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충당하는 데 쓰였다. (…) 한국에서는 노동자들 역시 사회를 거대한 경쟁 사다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등의 격차와 차별은 사회를 다른 무엇으로 상상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_143~144쪽


사실 상위 계층만 있다면 능력주의가 이토록 세를 넓히며 번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능력주의의 성공 비밀은 지식 중간계급 상위 계층이 아니라, 하위 계층의 열띤 지지에 있다.

_154쪽


이것은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구조적으로 지식 중간계급의 관심사나 지향, 가치에 편향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언론 등에서 일하는 이들이 지식 중간계급이고, 온라인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데 가장 능란한 것도 지식 중간계급이다. 이들이 자신을 중간계급으로 만드는 그 세계관에 별다른 의심을 던지지 않을 때, ‘공정’한 경쟁은 부각되지만 차별에 맞선 ‘평등’은 가려지게 된다.

_158쪽


지금 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에 노동계급이 능력주의 확산을 막는 세력이 되게 만든 요소들을 추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능력주의에 맞서는 세력의 요건을 ‘일반화’하는 작업이다. (…)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능이라는 평가 기준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독특한 사회적 상황과 위치였다. 이에 더해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에 맞서는 주체라는 자부심을 부여한 이상·이념이라는 요소가 있었고, 노동자들을 결집해 사회적 실체로 만든 노동조합이나 좌파 정당 같은 조직도 중요한 요소였다. ‘좋았던 옛날’의 노동계급이 그대로 부활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사뭇 다른 사회적 주체들 사이에서 이런 요소들이 새롭게 배양될 수 있을지 타진해 봐야 한다.

_167~168쪽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물음 자체다. 그람시가 강조했듯이, 인간이란 (정해져 있는 답이 아니라)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와 결합된 모든 경직된 이데올로기들은 인간을 이미 누군가로 좁게 규정해 놓는다. 서로 경쟁하는 존재이고, 항상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경제인이며, 경제적 기여에 따라 거대한 피라미드의 각 층에 배치될 수 있는 대상이다. 능력주의의 가장 뻔뻔한 점이 여기에 있다. 능력주의 안에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이미 나와 있다. 능력주의 안에서 인간은 살과 피를 지닌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조물인 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 목표가 된다. 이 목표에 얼마나 근접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이 배분되며, 누구든 빠짐없이 이 경주에 동참하는 것이 곧 자유이자 평등(한국식 표현으로는 ‘공정’)이 된다.

_185쪽


이렇게 돌봄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능력 다원주의는 다른 어떤 노동자의 능력 다원주의보다 더 강력하고 예리하게 능력주의의 핵심을 향해 돌진한다.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이 주조를 이루는 직업 활동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역량들이란 영이 열거한 저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처럼 능력(merit)과 능력 아닌 것의 경계에 선 역량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자들의 직업 ‘능력’은 현존 자본주의에서는 ‘반反능력’이자 ‘탈(脫)능력’이다. 이들은 이 경계 지대에서 던지는 참으로 아프고 난처한 물음을 통해 사회가 능력주의의 단잠에서 깨어나도록 흔들 수 있다.

_187쪽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식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상호 작용은 지식 중간계급 쪽의 능력주의 추종과 노동계급 쪽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지식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동맹이 능력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열기는커녕 둘의 긴장과 충돌, 크나큰 세력 격차가 능력주의의 지배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지식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관계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_199쪽


언젠가 B가 없는 쉬는 시간에 학부생 한 명이 오름에게 다가왔다. 자신들끼리 무언가 보며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참이었다. 이것 좀 보셔야 한다며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B의 페이스북 프로필이 있었다. “W 대학교 재학 중”이라는 한 줄의 소개는 그가 본교생인지 분교생인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러나 그건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굳이 본교와 분교를 나누어 자신을 드러내는 학생들이 더 적었다. 오름도 학부생 시절 SNS 프로필을 그렇게 해 두지 않았던가. 학교 선택란에서 분교를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그에게 학부생이 말했다.
“여기 프로필 사진 좀 보세요.”
손가락이 가리킨 프로필 사진 속의 B는 서울 본교의 정문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_218쪽


B는 W 대학 본교뿐 아니라 그 이상의 대학에 진학할 것을 기대받는 최상위권 학생이었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출신이었고, 내신 성적도 높았고, 학생생활기록부 개인별 세부 능력 특기사항의 정성적 지표도 모두 좋았다. 그렇게 되기 위해 그와 그의 부모가 쏟은 노력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수시모집에서는 운이 없었고 정시모집까지 떠밀려 와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한 끝에 그는 결심했다. 자신의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서는 W 대학에라도 가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은 분교에 진학해 1년 뒤 소속변경을 통해 본교로 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같은 마음으로 진학한 수십 명의 최상위권 학생들과 다시 경쟁해야 했다. 그에게 자신과 동류인 이들은 물리쳐야 할 경쟁자일 뿐이었고, 주변의 동기들은 자신과 곧 마주칠 일이 없어질 몇 등급 아래의 인간들이었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는 삶을 그는 앞으로도 몇 개월간 더 살 예정이다. B는 동기들이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떻게든 서울의 본교로 가고 나면, 그렇게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나면 과거의 노력과 지금의 노력을 모두 보상받고 그들과는 몰랐던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믿음만으로 한 시절을 버텨 내는 중이다.

_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