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Girlhood (2021년)
: 여성의 몸, 자아, 욕망, 트라우마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현대의 페르세포네들을 위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텍스트
사회과학 > 여성학/젠더
에세이 > 외국에세이
멀리사 피보스 지음 | 송섬별 옮김
21,000원 | 392쪽
ISBN : 979-11-93482-09-4
2024년 11월 29일 출간
✦ 책 소개
지금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논픽션 글쓰기 교수인 멀리사 피보스의 대표작이다. 30대 후반 여성으로서 자신의 10대와 20대 시절을 되돌아보며 어린 시절부터 억압받는 여성의 몸과 자아 그리고 다양한 여성들의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고찰하고 오늘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성공적인 전작들 『휩스마트』와 『나를 버려』로 오늘날 미국 최고의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저자는 세 번째 책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에서 ‘잡년’ 취급을 받으며 괴롭힘당한 청소년기와 도미나트릭스로서 성노동에 종사한 20대 초반 시절을 주로 다루면서 가부장제 체제가 여성의 10대 시절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자아 형성과 인간관계 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날카롭게 분석한다. 더 나아가, 다른 여성들과의 인터뷰, 문화 비평, 학술적 글쓰기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여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제의 작동 원리를 낱낱이 해부한다.
✦ 추천의 글
이 책에는 진심 어린 경고의 휘슬이 가득하다. 안 돼, 그 영화를 따라 하지 마, 그 소설과 드라마를 의심해. 타인의 눈요깃감이 되려고 허기진 몸으로 네가 어떻게 보이나 거울에 비춰보지 마. 그 거울을 깨부수고 ‘마녀사냥’을 사냥해. 거절하는 방법을 훈련하고 평판과 두려움의 빙벽을 넘어서! 여기, 나의 실패담과 ‘과오의 동지들’이 털어놓은 인터뷰를 엮어 너에게 밧줄을 내려줄게.
저자는 파수꾼이자 교관이 되어 챙이 긴 모자로 눈물이 괸 얼굴을 가린 채 지상의 무수한 함정과 지뢰를 소녀들에게 일러준다. 스토킹이 무서워 침대 옆에 칼을 두고 잠들던 나날을 지나 스스로 집도의가 되어, 답습하지 말아야 할 나쁜 사례로 자신의 과거를 해부대에 올린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라며 대충 무마하려는 범죄와 강요된 수치심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횃불을 들고 십 대 시절로 돌아가 자신을 침몰시켰던 “가부장제 발작”을 분석한다. 더는 소녀들의 몸과 정신이 세상에 난도질당하지 않게, 상처와 무기력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해저에 묻힌 자기 삶의 난파선을 끌어 올려 인생이 뒤집히던 순간을 끈질기게 재구성한다.
이러한 잔해의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백의 적나라함이 아니다. 회고의 밀도는 성노동이나 약물 중독 같은 구체적 경험 여부에서가 아니라 그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역사의 배후에서 축적돼 우리를 세뇌한 ‘문화’가 되었는지 밝히는 윤리적 분석에서 생겨난다. 부디 당신은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저자는 기꺼이 시행착오와 회복의 롤모델이 되어 독보적인 공유의 기술을 선보인다. 통계와 법, 학술 연구와 저널리즘을 이중 나선처럼 자전적 경험과 엮어 자신이 통과한 앎의 순간을 남김없이 베푼다.
나는 ‘온전하게 유별난’ 이 작가의 삶과 더불어, 능숙하고 지적인 서술의 배치에 감명받았다. 폭풍우 속에서도 끝까지 배의 키를 놓지 않는 이 선장을 따라 나도 다른 소녀들을 구하러 가는 항해 길에 오르고 싶다. 만약 내가 청소년 때 이 글을 읽었더라면 나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언젠가 십 대의 필독서가 될 이 책을 이제라도 만나게 되어 다행이다.
-김멜라
(소설가, 『없는 층의 하이쎈스』 『환희의 책』)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단호해진다. 그런 시절은 없다. 나의 어린 시절은 실수와 불가해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나’로 얼마만큼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끊임없이 시험했다. 나를 미워했고 벌주고 싶었으며 동시에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었다. 타인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다 보면 자주 비굴해졌다. 그 미묘한 성장의 시간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독서가 필요했다. 책은 ‘내가 이상한 걸까’라고 생각하는 외로운 여자아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보통이나 평범 같은 단어로 수렴되지 않는 삶을 가르친다. “앎이 자유를 보장”하지 않지만 적어도 자유를 희망하게 한다.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를 읽는 동안 나는 종종 일기장에도 쓰지 못했던 어떤 순간들과 마주쳐야 했다. “살아남는 데 진실은 필요 없고, 때로 우리의 생존은 진실을 부정하는 데 달려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적지 못한 이야기들이 내게도 있다. 아마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멀리사 피보스도, 나도, 당신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 살아있음으로써, 내가 지녔던 수치심에 계속해서 주석을 달 수 있다. 그 변화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대체로 지루”하지만 우리는 “내 경험이 남긴 결과를 검토”하며 생의 다음 단계를 향해 한 발을 겨우 뗀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떠올리기보다 지금을 잘 사는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
어떤 책은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타인의 이야기에 나의 이야기를 겹쳐보고 이어 쓰는 방식으로 독서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자신에게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 소란스러운 깨달음은 우리에게 해방의 감각을 선물한다. 멀리사 피보스가 말하기를 선택함으로써, 가부장제가 만든 비밀에 휩싸이는 대신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취약함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용감해진다. 우리는 모두 이상하고, 이상해서 사랑스럽다.
-장일호
(《시사IN》 기자, 『슬픔의 방문』)
이 훌륭한 에세이집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내 몸에게 더욱 깊이, 진실하게 귀 기울일 수 있게 그리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이미 짜여진 각본들을 뿌리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여러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권오경
(소설가, 『인센디어리스』)
《더 위크》 기고문
이 책을 통해 피보스는 소녀 시절의 끔찍하고도 강렬한 깊이를 고스란히 담아낸 위대한 기록자로서의 면모를 명한다.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영겁 같은 시간은 고대의 폐허처럼 해부, 노래, 탐구의 대상이다. 단단하고도 아름답기에 마치 이끼와 쇠를 연상시키는 이 글들에는 저자 특유의 영민함, 힘, 우아함이 배어 있다. 지금 꼭 필요한, 가슴 아픈 작품이다.
-카먼 마리아 마차도
(소설가,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내밀한 동시에 교훈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지혜로운 책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자신을 내면에서부터 정의하고자 하는 여성이라면 꼭 읽어야 할 융합적 텍스트다. 이 책은 사회의 관습적 메시지와 타인의 시선을 쫓아내는 퇴마 의식과도 같으며, 저자는 따뜻하고도 박식한 퇴마사다.
-멀리사 브로더
(시인, 소설가, 『오늘 너무 슬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주입하는 메시지들 그리고 이런 제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심문하는 뛰어난 에세이들. 나 역시 내 소녀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술라이커 저우아드
(에세이스트, 『엉망인 채 완벽한 축제』)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를 오랫동안, 흠뻑 빠져 읽었고, 수업에서 함께 읽을 계획이다. 피보스의 언어와 정서적 솔직함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대화에, 성적 동의를 하기엔 너무 어린 시절 우리에게 주어졌던 무시무시한 성적 자유를 다룬 대화에 깊이를 더한다. 그러나 저자에게서 피해자라는 태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으며, 그는 애써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영웅이다. 고전이라 불려 마땅한 작품!
-메리 카
(시인, 회고록 작가, 영문과 교수,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매혹적인 에세이 여덟 편을 통해 멀리사 피보스는 청소년기 트라우마를 파헤치면서 어린 여성의 삶에 따라붙는 부담을 폭로한다. 사춘기에 드리운 어둠을 독자와 나누며, 여성에게 가해지는 기대와, 그 기대가 한 사람의 자아 개념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애너벨 거터맨(저널리스트)
《타임》
이 책은 한 페미니스트의 생존 증언이다… 피보스의 목소리는 불경스러우면서도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표는 그저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여성들의 맥박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 연대 덕분에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피보스의 우상인 에이드리언 리치와 매기 넬슨을 포함한, 탄탄한 이론에 바탕을 둔 페미니스트 걸작의 반열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만하다. 영리하고, 급진적이며, 조금도 평범하지 않은 자매도서.
-벳시 보너(시인, 교수)
《뉴욕타임스 북리뷰》
피보스는 평생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몸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독자들에게 어린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진실로 어떤 의미인지를 탐사 보도, 회고록, 학술적 글쓰기를 혼합한 방식으로 써낸 이 책을 권한다. (또, 10대 딸을 이해하고 싶은 부모에게도 권한다.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엠마 스펙터(문화평론가, 에세이스트)
《보그》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를 어린 시절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포사이스 하먼의 심금을 울리는 삽화와 함께 실린 에세이 여덟 편을 통해, 피보스는 소녀 시절에 담긴 힘, 지식 그리고 취약함을 탐구한다. …청소년기의 괴롭힘을 분석하고, ‘슬럿slut’이라는 단어에 담긴 어원학적 뿌리를 탐구하고 커들파티를 배경으로 성적 동의의 진화를 탐구하는 내내, 그는 여성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착취하는 데 공모하도록 길들여졌는지를 보여준다. 학자로서 한 다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자아에 관한 신체적 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크리스틴 밀라레스 영(저널리스트, 소설가)
《워싱턴포스트》
피보스는 보기 드문 예리함으로 한 소녀가 “미지의 가치를 지닌 존재” 존재가 되게끔 만든 다양한 역사적, 문학적, 신화적, 일상적 요인들을 해체한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탐구 과정에서 피보스는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긴” 것이라 주장하는 한편으로, 우리가 미워하라 배운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다시금 되찾아준다.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가 뛰어난 가치를 지닌 것도 이 덕분이다.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어려운 일을 해낸 덕에, 조심스럽지도, 무모하지도 않은, 다만 깊이 있는 지혜와 치유를 담은, 용감하면서도 너그러운 이 책이 탄생했다.
-지나 프란젤로(소설가, 전미도서비평가협회원)
《로스앤젤레스 리뷰오브북스》
✦ 지은이
멀리사 피보스 (Melissa Febos)
1980년 출생으로,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16세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와 보스턴과 뉴욕에서 홀로 거주하며 공부하고 생계를 꾸렸다. 20대 초반 시절의 도미나트릭스 경력을 풀어낸 회고록 『휩스마트(Whip Smart)』(2010)으로 주목을 받으며 데뷔하였다. 『나를 버려(Abandon Me)』(2017),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Girlhood)』(2021), 『바디 워크(Body Work)』(2022)까지 논픽션 도서 네 권을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다섯 번째 책인 회고록 『드라이 시즌(The Dry Season)』이 2025년 6월 출간 예정이다. 2018년 람다문학재단의 잔 코르도바 논픽션상, 2022년 구겐하임재단 펠로우십과 국립예술기금 펠로우십을 수상했다. 미국 뉴스쿨대학에서 인문학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사라로렌스칼리지에서 글쓰기로 석사 학위를 받고 논픽션 글쓰기를 가르쳤다. 현재는 시인이자 반려자인 도니카 켈리와 함께 아이오와시티에 살면서 아이오와대학 영문과 정교수로 논픽션 글쓰기를 가르친다. 에이드리언 리치와 매기 넬슨의 뒤를 이어 지금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에세이스트이다.
✦ 옮긴이
송섬별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읽고 쓰고 번역한다. 여성, 성소수자, 노인, 청소년이 등장하는 책을 좋아한다. 고양이 물루, 올리버와 함께 산다. 옮긴 책으로 『젠더를 바꾼다는 것』, 『페이지보이』, 『페미니즘들』, 『자미』, 『불태워라』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소녀들을 구하러 가는 선장의 항해 같은 글쓰기”_김멜라, 소설가
“우리에게 해방의 감각을 선물하는 이야기”_장일호, 기자
“내 몸에게 더욱 깊이, 진실하게 귀 기울일 수 있게 도와주는 책”_권오경, 소설가
★ 2021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 수상작
★ 2022 람다문학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
★ 전미 베스트셀러
★ 《타임》, 《워싱턴포스트》, 《커커스리뷰》, 《퍼블리셔스위클리》, 《NPR》 선정 ‘올해의 책’
★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핀란드, 아르헨티나 등 출간
“몸에는 진실이 새겨지고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_본문에서
● 진정한 ‘나’의 관점에서 과거를 다시 쓰면서
무한한 감정과 가능성을 품은 ‘몸’을 이야기하다
모든 여자아이가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10대와 20대 시절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미디어가 비추는 소녀나 젊은 여성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아, 나야말로 지저분한 아이였다.” “나는 자기혐오로 활활 탔다.” 저자의 몸은 칠칠치 못하고 정리·정돈에 서툰 몸, 타인들에 의해 대상화되는 몸, 자신을 미워하는 몸이었다.
특히 그는 조숙한 몸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견뎌야 했던 폭력과 지속적으로 느껴왔던 슬픔과 수치심을 털어놓는다. 16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보스턴과 뉴욕에서 홀로 살며 마약에 빠져들었고, 20대 초반에 인문대학생이자 도미나트릭스로서 성노동에 종사할 당시 몸이 분리되는 것 같은 해리(解離) 또는 얼어붙는 듯한 경직 상태를 겪었던 경험까지 가감 없이 고백한다. 영문학과 문예창작학으로 유명한 아이오와대학교의 논픽션 글쓰기 교수인 저자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은 채 적정 거리를 두고 복잡한 과거를 관찰하기에, 내밀한 회고에 날카로운 통찰이 뒤따른다.
“그들은 처음부터 나를 잡년이라 불렀다. 그 말을 실제로 입 밖에 내기 전부터. 어느 소년이 내 몸을 만지기 전부터. …부끄러운 건 모욕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도록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수정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거나, 적어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내심 그 이야기를 믿어버린다.”
_본문에서
저자는 ‘잡년’과 ‘걸레’ 등으로 낙인찍혔던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다시 쓰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가부장제가 어떻게 소녀 시절부터 여성의 자아 형성 과정에서 작용하고 몸에 내면화되는지 지적한다. 그는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면서 자신의 몸을 혐오하게 되고, 16세에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의 몸처럼 가녀린 몸을 동경한다. 원치 않는 스킨십을 요청받을 때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낯선 남자가 자신을 스토킹할 때 습관적으로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하며, 불안정한 연애 관계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고백하면서 ‘잡년’이라 불린 과거의 이면에 가부장제가 숨어 있었음을 밝힌다.
또한 이 책은 어두운 세계를 수동적으로 겪어낼 뿐만이 아니라 밝은 세계를 능동적으로 감각하는 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0대 시절의 저자는 캠프에서 만난 소녀와의 스킨십을 계기로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첫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쾌락과 욕망을 발견한다. 30대 중반에 이르러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며, 반려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친다. 몸은 취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성장과 만남의 과정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세계를 경험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한 개인의 과거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여성을 억압해온 가부장제의 유구한 역사를 톺아보며 대담한 서사를 펼쳐보인다. 그에 의하면 15세기 마녀사냥의 양상은 오늘날의 ‘잡년’ 취급과 겹쳐볼 수 있다. 또한 ‘성적 동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여겨지는 섹스와 로맨스는 20세기에야 등장한 개념이며 그전까지는 재생산과 연관되어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의무였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를 아우르며 보편 여성의 몸과 삶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깊고 넓은 시각은 우리가 무심코 수용해온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보인다.
● 현대의 페르세포네들의 집단 초상화를 그려내며
어둠을 딛고 여성 연대와 사회 변화를 향해 나아가다
저자는 ‘나’의 기억에서 ‘우리’의 기록으로 나아가면서 한 여성의 섬세한 내면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의 다채롭고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으로 어릴 적 자신을 질투하고 괴롭히던 또래 여자아이들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 10대 시절 처음으로 유대감과 결속감을 알려준 레즈비언 친구 제시카, 동경과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청소년 캠프 지도자 나디아, 딸이 오랜 방황을 끝내기를 묵묵히 기다렸던 어머니가 있다. 이렇게 저자는 부지불식간에 가부장제의 공모자가 되었던 어린 여성들을 회상하며 제도의 실체를 고발하는 동시에, 이 제도에 굴하지 않았던 주체적인 여성들을 그리며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저자가 인터뷰하거나 조사한 여성들의 증언과 폭로이다. 저자는 인터뷰와 연구를 통해 오늘날 여성들이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감정 노동, 데이트 폭력, 성추행 등을 철저히 파헤치며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들은 “가부장제 귀신”에 들려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욕구보다 남성의 욕구를 우선시했고, 심지어 성폭행을 당할까 두려워서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을 받아들이거나 성폭력 피해자가 된 뒤에도 가해자 남성이 느낄 수치심을 걱정했다. 저자의 회고와 성찰 사이사이에 다른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차되면서 이야기는 한층 더 확장된다.
“여성 중 대부분은 답변지 마지막에, 이 글 속 사건들을 여태 아무에게도, 때로는 자신에게도 자세히 이야기한 적 없다고 썼다. ‘당신이 만약 이 글을 읽지 않더라도, 전 이 글을 쓸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그들은 누군가가 물어보기 전까지, 자신에게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
_본문에서
저자를 비롯한 이 “평범한” 여성들은 저마다의 어둠을 품고 살아온, 현대의 페르세포네라고 볼 수 있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의 서사에 여러 판본이 있듯이, 여성들은 각자의 삶의 서사의 새로운 판본을 쓸 수 있다. 그렇기에 저자도 20여 년에 걸쳐 자신의 어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어머니와의 관계를 차츰 회복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를 통해 전 생애에 걸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냈다. 여성으로 살아가며 “남성들[이 만든] 어둠”을 견뎌낸 이들의 이야기에서는 여러 공통점과 차이점이 발견되고, 이를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함께 연대할 수 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를 회고할 때 저자의 목소리는 종종 불안과 혼란으로 떨리곤 하지만, 동시대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는 씩씩하다. 흘러온 시간만큼 단단해진 그는 가부장제의 착취 아래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자들의 말하기를 북돋우며, 가부장제의 작동을 저지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지치지 말고 서로의 이야기에 기대며 함께 나아가자고 말한다.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사회 전체에 가닿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 세계문학부터 넷플릭스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 속에 도사린 가부장제와 여성 혐오를 밝혀내다
내면적 상처와 사회적 억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문화 비평을 경유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작동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는 문학소녀 시절에 좋아했던 이디스 워튼의 소설 『환락의 집』을 30대 후반에 다시 읽으면서 여성의 자아를 억압하고 이중생활을 강요하는 체제를 발견한다. 한편 대학교수로서 매해 가르쳐온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단편소설 「소녀」를 인용하며 ‘잡년’ 개념을 사회 문화적·어원학적으로 연구하기도 한다. 모녀 관계와 여성의 욕망을 고찰할 때는 페르세포네 신화, 고전학자 앤 카슨의 학술 에세이 『달콤씁쓸한 에로스』, 호메로스의 「데메테르에게 바치는 찬가」를 촘촘히 엮어낸다.
드넓고 자유로운 사유는 인문사회 고전과 영상 매체로까지 뻗어나간다.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 속 「성애의 활용」을 끌어와 여성의 성애와 자유를 논하고,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가 다루는 남성중심적 시선과 자크 라캉의 『에크리』에 언급된 ‘거울 단계’ 개념을 통해 자아 형성 과정을 살핀다. 저자의 어머니와 저자가 좋아했던 할리우드 고전 영화 〈이창〉과 〈현기증〉 그리고 에마 스톤 주연의 영화 〈이지 A〉,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마인드헌터〉에까지 이르며 우리 사회에서 교묘히 작동하는 여성 혐오를 짚어낸다.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 학술 연구를 오가는 지적 탐구는 회고록이라는 내밀한 장르와 만나면서 독창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남성중심적 문화를 무심코 수용했던 어린 여성의 ‘과거’와 여성 혐오적 영화를 보며 스토킹 피해 경험을 떠올리는 페미니스트의 ‘현재’가 교차한다. 세밀한 회고는 공감을 자아내고, 치밀한 비평은 가부장제 원리를 선명히 의식하게 만든다. 시간과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정적 감수성과 예리한 통찰력을 두루 선보이는 이 하이브리드 텍스트는 독자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을 선사하며, 《뉴욕타임스 북리뷰》가 평한 대로 “에이드리언 리치와 매기 넬슨을 포함한, 탄탄한 이론에 바탕을 둔 페미니스트 걸작의 반열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만하다.”
20대 초반 시절의 도미나트릭스 경력을 담아낸 회고록 『휩스마트』(2010)로 데뷔하여, 『나를 버려』(2017)로 수많은 수상 및 후보 목록에 오르고 유수 언론의 극찬을 받으며 미국에서 이미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한 베스트셀러 작가 멀리사 피보스는 세 번째 책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2021)에 이르러 30대 후반 여성으로서 여성의 삶 전반을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여덟 편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저자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와도 같은 핵심 저작이다.
삶에 대한 경험과 성찰, 글쓰기 능력이 한껏 무르익은 멀리사 피보스의 대표작이 한국 독자들에게 때마침 당도했다. 스토킹, 불법 촬영, 남성적 응시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이제 몸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쓸 기회가 온 것이다. 피보스가 보여주는 여성들의 고유한 서사와 사회의 적나라한 풍경은 독자에게도 각자 저마다의 어둠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목소리를 낼 용기를 준다. 마침내 우리에게 다다른 이 기념비적인 페미니즘 에세이 걸작은 어린 여성부터 노년 여성에 걸쳐 오랫동안 폭넓게 읽히면서 진정한 자아와의 대화를 그리고 사회와의 대화를 계속해서 끌어낼 것이다.
✦ 목차
추천의 말
작가의 말
프롤로그—흉터 짓기
케틀홀
거울 검사
와일드 아메리카
침해
테스모포리아
자신을 아껴줘서 고마워요
레 칼랑크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참고 문헌
✦ 책 속에서
그 당시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내 소녀 시절의 슬픔, 그러니까 어둠이 나만의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녀 시절은 우리가 인정하고자 하는 것보다도 더욱 어두운 시절이다. …이 책을 쓰는 일은 어느 정도는 내 소녀 시절을 수정하고, 나 자신을 회복하는 법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친구 삼았고, 우리의 평범함 역시도 치유력이 있음을 알게 됐다.
-18~19쪽
한때 강인했던 내 몸은 내던져지고 쪼개지고 하도 만져 모서리가 둥글어진 수동적인 사물이 되었다.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50쪽
그 소년, 그의 커다란 손과 축축한 입을 떠올리면, 때로 그때로 돌아가 ‘싫다’고 말하고 싶다, 땅속에 깊이 파묻힌 내 조각을 끄집어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 소녀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싶다. 그 애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 애는 그저 자기가 아는 최선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던 거다. 때로는 우리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야기, 우리가 살면서 짓고 또 품고 다니던 이야기를 지워야 한다. 약간의 수수께끼를 남기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데 진실은 필요 없고, 때로 우리의 생존은 진실을 부정하는 데 달려 있다.
-57쪽
그 시절에 최악인 동시에 가장 오래 지속된 건 내가 느끼는 완전한 고독감이었다. 수치심은 이 때문에 탁월한 지배의 전술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립되도록 길들인다. 사회 구조는 그 구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다. 애초부터 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이 기계는 우리가 사회 구조를 영속화하게끔 강제한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무도 혼자가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
-122쪽
내 이야기는 평범하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그렇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도 더 지독한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잡년은 마녀와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가하는 권력을 유지하고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하고자 남성들이 발명한 말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이해하는 그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향한 혐오와 두려움은 문명의 기반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으며, 잡년이라 불리는 이들은 가부장제와 백인 중심주의라는 식민 제도를 위협하는 여성일 때가 많다.
-128쪽
가엾은 몸. 소중한 몸. 어떻게 이 몸이 이런 취급을 받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단 말인가? 내 몸은 ‘나였다.’ 자기 몸을 혐오한다는 건 정신적 자가면역질환을 앓는 것과 같았다. 그런 순간들이면, 나는 내가 정신질환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몸과 맺고 있는 이 적대적인 관계를, 말 그대로 정신질환 말고는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행동 중 어떤 것이 타고나길 ‘나인’ 것이며 어떤 것이 문화적으로 부과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149쪽
여러 여성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나는 두 명의 집사가 기싸움을 벌이는 집처럼 살아왔다. 한 집사가 찾아올 손님을 위해 끊임없이 벽을 도배하는 사이 다른 한 집사가 벽지를 찢는다. 한 집사가 고급 요리를 하면 나머지 한 집사는 요리를 쓰레기통에 쏟아버린다.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 낭비인가! 어쩌면 당신은 이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가부장제와 싸우는 동시에 여전히 강박적으로 칼로리를 계산하며 사는 법을 알 테니까. 교차성 페미니즘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당신의 가치는 남성이 얼마나 탐내는 여성인지와 정비례한다고 내심 믿을 수도 있다. 의식은 허위의식을 방지하지 못한다. 그것이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다.
-158쪽
여태 나는 자유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나? 아름다움이 자유를 얻기 위해 치르는 값이라고, 나 자신이 되려면 성공적으로 나를 지워 없애야 한다고 오해했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자기혐오를 버리고 자유를 깨치려면, 자기혐오로부터 이득을 얻는 체계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162쪽
…모든 도시의 여성은 아파트 문을 닫고 걸어 잠그는 순간 몸이 느끼는 안도감을 안다. 이 신성함을 침해받은 순간 나는 공황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왜 나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한밤중에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남자의 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했나? 혹시 과거의 어느 오후, 그가 보는 앞에서 내가 ‘정말’ 자위를 했을 가능성이 있나? 이렇게 돌아볼수록 과거의 순진했던 내가 무책임해 보였다. 심지어 내 과실 같기도 했다. 방 안에서 벌거벗고 서 있었던 나는 얼마나 순진하고, 무지막지하리만큼 조심성이 없었나? 아는 사람이 이런 일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물론 아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겪은 적 있느냐고 물은 적도 없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선뜻 꺼내는 건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어서다. 우리에게 과실이 있다는 믿음은 우리의 침묵을 부추기고, 우리의 침묵은 우리에게 과실이 있다는 거짓말을 지켜준다.
-176~177쪽
선량한 남자들은 말한다.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야!”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다루는 건 우리 몫이다. 이 말은 즉, 폭행을 당하는 입장이자 그런 일을 당할까 봐 늘 두려워해야 하는 입장인 여성으로 사는 건 당연히 짜증 나는 일이지만, 그래도 남성들의 기분을 해치는 게 더 최악이라는 소리다. 우리의 안전을 대가로 치러야 할지라도, 선량한 남자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여성이 할 일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성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순응하도록 훈련해왔다.
-205~206쪽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에서 보낸 시간은 자연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자연의 실현이다. 내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바라보게 됐다.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나는 거듭해서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두 영역 모두 내 집이다. 이 이야기에는 하데스도, 납치자도 없다. 오로지 나뿐이다. 이런 사실을 어머니에게 숨길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되어 다행이다. 덕분에 이제 어둠이 나를 죽일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줄어들었으므로.
-238쪽
어머니와 나의 유대가 이런 타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할까 봐 두려워하던 나는 과거의 나다. 나는 어린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걸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약속했다.
-239쪽
에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가부장제가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뇌를 점령한 거야.” …가부장적 가치를 지워내려 애쓰는 사람의 마음에도 한순간 퇴행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는 것. 내가 아는, 자아실현에 가장 성공한 여성들 역시도, 지성으로는 규탄한 지 오래인 권력 구조에 여전히 충성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뜻밖의 순간에 “그 음식 먹으면 안 돼!”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다.
-270~271쪽
우리는 화장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우리가 다리 면도를 하는 이유는 여성다운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다른 여성들을 위해’ 옷을 차려입는다. 명령은 우리의 집 안에서 나온다. 즉, 가부장적 강압은 유령이다. 소녀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으며 아직도 사로잡고 있는, 내 몸이 “싫어”라고 말할 때 내 입에서 “좋아”라는 말을 쥐어짜내는 도깨비다.
-306쪽
내 몸을 혐오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쏟으며, 섭취하는 음식물을 강박적으로 감시하고 지칠 때까지 운동을 수행하던 시절을 종종 떠올린다. 내 목표는 미국 문화가 처방한 바 그대로였다. 내 자연스러운 체형을 거스르는 미의 관념을 체현하는 것. 그러면서 이 목표에 얼마나 다가가는가에 따라 내 가치를 측정했다.
-352쪽
어쩌면, ‘정말’ 내가 문제인 건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모든 [마약] 중독자, 자신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두려움이다. 나를 고통받게 하는 것, 내가 나에게서 혐오하는 부분이야말로 나의 가장 진정한 모습, 영영 긁어낼 수 없는, 그을리고 독을 품은 핵심인 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능성 말이다.
-341쪽
어린 시절 나는 온갖 것—타인의 몸, 도시들, 나 자신—에 대고 내 몸을 그어댔지만, 내가 그것들에게 남긴 자국도, 그것들이 내게 남긴 자국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미지의 가치를 지닌 것은 가치가 없었고,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취급했다. 내면이 검고 푸른 멍투성이가 될 때까지 내 삶을 두들겨 댔다, 그렇게 하면 아픔을 멈추는 법을 알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다 마주하는 사소한 다정함은 아무리 덧없다 해도 귀했다. 그런 것들이 내 삶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375쪽